레즈비언과 배우 지망생 그리고 덜 떨어진 황인
이제 목표했던 더반(Durban)으로 향한다. 케이프타운(Cape Town). 겨우 나흘 머물렀지만 고마우신 목사님의 도움으로 아주 편하게 머물다, 그리고 케이프타운에 좋은 인상만 가지고 간다.
버스 정류장에서 배웅 나온 친구들과 목사님께 포옹으로 인사를 한다. '포옹' 긴 말 필요 없는 그리고 진정 정 깊은 인사가 아닌가? 차창 밖에 버스가 출발해 안보일 때까지 그들이 손 흔들고 있다. 누군가를 보내는 사람은 한 사람을 보내지만, 떠나는 사람은 모두를 보낸다는 어느 누군가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언어에 대한 압박과 새로운, 전혀 알지 못 하는 또 다른 어느 곳으로 향한다는 두려움. 이제 약 30시간가량 버스에만 있어야 할 것이다.
옆자리에 이제 고등학교 1, 2학년쯤으로 보이는 흑인 친구가 하나 앉아 있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누런 피부의 황인 하나가 제 옆자리에 앉는다는 걸 신기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듯싶었다. 당장이라도 말을 건네고 싶었으련만, 그는 참을성 있게 아쉬운 작별의 순간을 끝까지 기다려 주었다.
"하이(Hi)"
드디어 입이 떨어졌다.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앞으로 수백 번을 더 들을, 뻔한 질문들을 인사치레로 한다.
"어디서 왔어?"
한국.
"난 아무개야. 네 이름은?"
순간 당황하는 황인이었다. 영어 이름을 안 만들었던 것이었다. 송(Song)이라고 대답한다. 성(姓)이다. 그리고 더듬더듬 더반에 있는 대학교에 유학 왔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이 덜 떨어진 황인은 지금 제가 자기를 어떻게 소개했는지도 전혀 기억을 못 하고 있다.
"난 배우가 되려 해. 그래서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돈도 많이 벌고 싶어. 그래서 나 더반에 가는 거야."
배우 지망생이라. 그러고 보니 이 친구 제법 잘 생겼다.
"비록 더반에는 아는 사람도, 잘 곳도, 그리고 돈도 없지만 난 꼭 성공할거야."
뭐? 그럼 가족들은?
"모두 케이프타운에 있어."
이런 황당한 친구가 다 있나. 이제 고등학교 2학년짜리가 배우가 되려고 집을 나와 잘 곳도, 아는 이도 없는 땅으로 돈도 없이 간단 말이야? 종종 아는 친구들 중에 배우를 또는 가수를 꿈꾸는 친구들은 있었어도 이 친구처럼 무턱대고 상경하는 친구는 본적이 없다.
한 시간이나 달렸을까? 버스가 선다. 간이 버스 정류소이다. 반도 안 차있던 버스가 그나마 반은 조금 넘게 찼다. 30대 중반쯤이나 되어 보이는 한 백인 여자가 웃으며 인사하고 옆자리에 앉는다. 세 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에 창 쪽에서부터 흑인, 황인, 백인이 쪼로로 앉아 있다. 역시 그 여자에게도 이 황인은 관심 대상이었다. 한 시간 남짓 동안 벌써 열 번은 더 들었을 자기소개를 또 한다.
"난 지금 포트엘리자베스(Port Elzabeth)에 여자 친구(girl friend) 만나러 가는 길이야."
"여자 친구?"
여자가 말하자 옆에 앉아 있던 어린 배우 지망생이 놀라 묻는다. 뭐 놀랄 일이라고, 여자가 여자 친구 만나러 간다는 게. 이 무지한 황인은 남자 친구(boy friend)와 여자 친구(girl friend)는 '애인'을 뜻한다는 걸 배운다.
"난 5년 전쯤에 남편과 이혼하고 지금은 여자 친구 만나고 있어. 난 레즈비언(lesbian)이야."
뭐 이런 친구들이 다 있는지. 자기가 레즈비언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이런 황당함이란. 옆에 있던 배우 지망생은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
이상한 이 셋은 몇 시간 동안 함께 했다. 버스가 중간 중간 휴게소에 설 때 마다 같이 내리고, 같이 먹거리를 사고, 같이 먹다가 같이 버스에 올랐다. 두 남아공인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이것저것 영어 단어를 가르쳐 주고, 한국에 대해 묻고, 또 남아공에 대해 설명해 줬다. 특히 레즈비언 친구는 밤잠도 제쳐두었다. 중간 중간 버스가 설 때마다 누군가가 내리고, 새로운 사람들이 타고 했다. 새벽 1시나 되었을 쯤, 레즈비언이 짐을 챙기기 시작한다. 이제 곧 내릴 거라고. 몇 시간이었지만 정 들어, 아쉽기만 했다. 악수와 포옹을 인사로 레즈비언 친구가 버스에서 내린다. 창 밖에 그녀의 여자 친구가 그녀를 껴안고 인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데……. 동성연애에 두 발 벗고 반대하던 이 황인은 그들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잤을까? 햇살에 눈을 떴다. 시계도 가방 깊숙이 박아 넣어 둔지라 몇 시인지 알 길이 없었다. 옆에 배우 지망생은 여전히 자느라 정신이 없다. 주위를 대충 둘러보니 사람들이 제법 많이 바뀌었다. 아무래도 케이프타운에서 더반까지 버스로 가는 이들은 황인과 배우 지망생 둘 뿐인 듯싶었다. 하긴 대부분은 비행기로 가겠지. 이스트 런던(East London)이라는 곳에 도착하자 험악해 보이는 두 사람이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앞자리부터 차근차근 표 검사를 한다. 검표관이었다. 표를 꺼내 들고 그 두 사람을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배우 지망생이 표를 좀 보여 달란다. 그에게 건네자마자 그는 세 장으로 되어 있던 표 중에 한 장을 찢어 제 호주머니에 넣고 나머지 두 장을 돌려주었다.
‘표를 잃어버렸나 보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지만 표를 다시 내놓으라고 야박하게 굴 수는 없다. 어차피 나머지 두 장이 있으니 별 문제야 없겠지. 마침내 검표관들이 왔다. 표를 받아 든 그들은 제들끼리 알 수 없는 말로 몇 마디 주고받더니 버스 앞쪽으로 좀 와달란다. 그 한 장이 그렇게 중요한 거였나? 나머지 한 장 어디 있냐 묻기에 잃어버렸다고 대답했다. 승객 명단을 펴더니 여권을 보여 달란다. 여권을 가져다 주자 이름을 승객 명단에서 확인하고 새로운 표 한 장을 즉석에서 끊어준다. 그리고 웃으며 이제 잃어버리지 말라고 충고한다. 걱정스런 눈빛으로 앞 쪽을 쳐다보던 배우 지망생은 일이 무사히 잘 진행되자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배우 지망생 차례이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얻은 표를 꺼내 검표관들에게 건넸다. 그런데 표를 보자마자 검표관들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어진다. 그들은 받아 든 표를 황인에게 보이며,
"네 표 여기 있다."
아차! 그 표에는 승객 이름이 떡 하니 써 있었던 것이었다. 검표관 중 하나가 배우 지망생에게 알 수 없는 남아프리카 말로 윽박지르자, 배우 지망생은 당황한 표정으로 열심히 변명을 하는 듯싶었다. 결국 그 역시 승객 명단 앞으로 끌려 나갔고, 잠시 후 그는 주섬주섬 짐을 챙겨 버스에서 쫓겨났다. 그는 더반행이 아닌 중간쯤 되는 곳까지 버스표를 끊었고, 그래서 중간에 더반으로 가기 위해 표를 훔친 것으로 판명이 났던 것이었다.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안녕이었다.
황인은 그렇게 처음으로 사귀었던 두 남아공 친구들을 보내었다.
<쪼콩>
오늘 이야기 재미있으셨나요?^^
처음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도착하여 케이프타운에서 더반까지 버스로 향하는 길에 만난 친구들에 대해 적었습니다.
지도를 보시면요 케이프타운은 남아공 남서쪽 끝자락에 있구요, 더반은 동쪽에 있어요.
확인해 보셨나요? 히히 거리가 상당하죠?!^^ 버스로 30시간 조금 못되게 걸리더라구요.
더반은 KwaZulu Natal 지역에 있는 가장 크고 가장 상업화된 무역항구도시랍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수출입 항구라죠?!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 그 항구가 보였는데 뭐 제가 무역에 대해 하는게 영 없어서인지 작아보이더라구요^^ 하지만 학교에서 내려다본 항구 경치는 아주 그냥 죽여줘요.ㅋ 맨날 점심밥 사들고 항구가 잘 보이는 잔디밭에 앉아 밥 먹었던 생각이 나네요^^
한국에 있어서 더반 하면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로 유명한 권투선수 홍수환씨의 바로 그 경기가 있었던 장소로 많이 알려져 있죠. 아직도 어떤 분들에게 "더반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러면 "어! 홍수환이 경기했던 곳 아냐?" 하더라구요.
이 이야기를 보시고 서로 많이 나누었으면 합니다^^ 보시고 어떠셨는지 댓글도 많이많이 달아주시공~ 댓글들 보면서 저는 수정, 정정, 고치기, 땜빵, 삭제, 훔쳐오기 등에 적극 참조하여 더 재미난 글들 쓰도록 할께요~
첫 이야기 이렇게 열었네요. 시작이 반이라죠?^^
그럼 내일 또 재미있는 이야기 올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