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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과 민족

 

 

글머리에 앞서, 이 글은 욕먹을 각오를 하고 쓴 글이라는 점을 밝혀 둔다. 인류학에 있어서 ‘낫 놓고 이게 기역인가?’ 하는 주제에 이제부터 사회 진화네 뭐네 하는 소리들을 지껄일 것이다. 다른 학자들의 글을 충분히 읽고, 더 충분히 공부하고 이 글을 쓴다면 더 좋겠지만, 급한 성질 탓에 제대로 공부도 안하고 일단은 지껄이고 본다. 

 

‘아’다르고 ‘어’다르다. 당연하다. 그런 맥락에서 부족과 민족은 같은 듯 참 다르다. 

 

 

 

부족(部族): [명사] 같은 조상·언어·종교 등을 가진, 원시 사회나 미개 사회의 구성단위가 되는 지역적 생활 공동체.

 

 민족(民族): [명사]일정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동안 공동생활을 하면서 언어와 문화상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 집단.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아프리카에 있어서 부족이라는 단어는 차라리 생기지 말았어야 할 단어이다. 아프리카 부족과 아프리카 민족, 이 두 단어 중 나조차도 아프리카 민족보다는 아프리카 부족이 듣기 더 친숙하다. 아프리카 민족이라는 단어 보다는 아프리카 부족이라는 단어를 사는 동안 훨씬 더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리라. 인류학의 선구자라는 멍청이들이 아프리카에 갖다 붙인 단어 ‘부족’으로 인해, 우리는 아직까지 아프리카를 미개한 대륙으로 먼저 판단하고 사고를 진행한다. 부족이라는 단어는 그 느낌만으로도, 그들은 벌거벗거나 아랫도리만 겨우 가린 채, 창 들고 활 들고 들판을 뛰어다니며 짐승들을 쫓아다닌다. 코끼리에게 독화살 한 대 박아놓고 코끼리가 쓰러질 때까지 무식하게 쫓아다닌다. 이는 단순히 우리와 다르다는 의미만을 내포하고 있지 않는다. 이는 웃기는 것이다. 

 

위에 사전에서 인용한 ‘부족’이란 단어에는 분명히 ‘미개 사회의 구성단위’라고 나와 있다. 그래서 아프리카 부족은 미개하게 된 것이다. 그들이 미개하기에 부족이라 부른 것이 아니라 그들을 부족이라 부르기에 그들이 미개한 것이다. 사실은 미개하지 않다. 그렇지만 미개하다. 사회 진화론에서 떠들어 대던 사회의 진화는 유럽의 선진 문명이라는 이름 좋은 껍데기를 핑계로 유럽 외 사회를 미개하고 미천한 부족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유럽 부족’이라는 말은 어떤가? 게르만 부족, 앵글로 색슨 부족이라는 말은 어떠한가? 불행하게도 그들에게는 부족보다는 민족이 훨씬 어울린다. 그래서 그들은 미개하지 않은가 보다. 웃기는 것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 집단’이라는 표현이다. 

 

 

 

 역사 [歷史]: [명사]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또는 그 기록. 

 

 

 

유럽 부족은 과거 화려한 그리스, 로마 문화를 토대로 문화, 종교,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절대 많은 분야에서가 아니다. 모든 분야에서이다- 세계를 이끌어 왔다. 그들은 역사를 토대로 형성된 집단이다. 역사를 통해 정당하고 검증된 사회 변화를 겪어 왔다. 그래서 그들의 모습은 인류의 정도(正道)이며, 그렇기에 인류 사회는 유럽 사회의 모습을 닮아가야 한다. 

 

반면 부족에는 역사가 없다. 그저 같은 조상, 같은 언어, 종교 등을 가진 원시 사회나 미개 사회의 구성단위가 되는 지역적 공동체일 뿐이다. 민족이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 집단이라는데 비하면 이는 엄청난 차이이다. 말대로라면 부족에는 역사가 없다. 역사가 없기에 그들에게는 학교 역사 시간에 배웠던 정치, 문화, 경제 등 인간 집단과 관련된 어떠한 것도 허용이 되지 않는다. 한발 더 나가보면 부족이라는 단어는 그들에게 역사를 빼앗아, 그들의 시간마저도 앗아가 버린다. 시간이 없기에 그들에게는 변화도 없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까지 옷을 입을 줄도 모르며, 창과 활로 짐승 사냥에 정신이 없다. 역사는 곧 시간이며, 역사가 없다는 아프리카에 대한 인식은 그들의 시간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인간은 이제 우주를 들락날락 하는데도, 유독 아프리카인들 만은 아직도 너른 산과 들을 알몸으로 뛰어다닌다. 

 

왜 우리는 그들에게서 역사와 시간을 빼앗아 버렸는가? 이는 앞서 말한 잘난 인류학자들 덕택이다. 그들은 자기와 다른 모습을 우습게 치부해버렸다. 물론 모든 책임을 그들에게 떠넘길 수는 없다. 어쩌면 그들은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아프리카에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에 최대한 그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 애 썼을 것이다. 물론 우습게 표현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이미 ‘인류는 진화한다’라는 생각에 젖어있었고, 그 진화의 정점 유럽을 향해 아프리카는 달려가고 있다 판단했다. 말 많은 생명 진화론 계보를 보면 인간은 단세포 생물에서 시작해 진화의 꼭대기에 서있다. 인간으로 진화하지 못한 다른 생명들은 그들 나름대로 훌륭한 삶의 방식을 찾아냈고, 그에 맞게 진화해 왔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 지구상에 살아남은 생명들은 모두 진화의 정점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인간만이 그 정점이라 착각한다. 그래서 동식물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 상당수는 조사 대상을 인간과 비교하여 설명한다. 사회 연구도 이와 비슷하다. 생명 진화와 비교하자면 유럽은 인간이고, 다른 민족은 아직 인간이 되지 못한 생물이다. 그래서 그들 인간 집단을 표현하는 단어도 민족이 아닌 부족이다. 이미 인간의 눈에는 사자나 호랑이와 같은 맹수조차도 그저 우스운 존재이다. 유럽에게 아프리카는 그저 맹수였다. 과거 유럽이 아프리카를 침범할 당시, 총과 대포 앞에 창과 칼로 할퀴며 달라 드는 그저 성난 맹수일 뿐이었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인들을 보며 유인원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는 그 중간 단계라고 까지 생각했다는 사실은 더 이상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래서 살아 있는 사람을 잡아다가 박물관에다 전시를 해 놓기도 했다. 유럽인들에게 아프리카인은 인간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과거 흑인 노예들은 유럽인들에게 당연한 것이었다.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이도 없었을 것이었다. 소에게 밭일 시키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인간이 아니었기에 그들에게는 역사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들에게 역사가 있다는 사실은 조금도 용납되지 않았다. 에티오피아의 찬란하고 위대한 역사도, 서사하라를 지배하던 송가이(Songhai)도, 짐바브웨에 세워진 돌 성도 유럽인들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사실이었다. 짐바브웨의 돌 성, ‘그릿 짐바브웨 (Great Zimbabwe)’ 를 솔로몬 왕이 보물을 숨겨놓은 성이라고 한 일은 웃기려 작정을 해도 아주 단단히 작정한, 웃기지도 않는 사건이었다. 유럽의 인류학자들은 이런 아프리카인들의 집합을 부족이라고 불렀다. 민족이라 부르기에는 뭔가 덜 떨어진 단체였다. 생물 진화 학자들이 다른 생물을 인간에 비교하여 설명하듯, 유럽 인류학자들은 다른 민족을 유럽에 비교하여 설명하였다. 그들도 알지 못하게 자리한 유럽 우월주의를 머릿속에 담은 채 말이다. 그 우월주의는 인류학자들이 유럽과 아프리카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어쩌면 자기네도 모르게 아프리카를 열등한 모습으로 그렸다. 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각자 나름 진화의 최상위에 있는 것처럼, 아프리카 역시 사회 진화의 정점에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거나, 잊었다. 그나마 사회 진화 라는 게 있다면 가능한 이야기지만 말이다. 

 

독자들이 글을 읽으며 이 상황은 이제 더 심해진다. 아마 그들은 어디서 ‘아프리카인들은 옷도 안 입고 벌거벗은 채 다니며, 무슨 짐승 소리인지 인간 소리인지 구분이 안 되는 소리로 띠까띠까 거리며 다니더라.’ 라는 소리를 이미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 덜 인간된 인간들의 모습을 상상하였으리라. 이제 독자들이 상상했던 그들의 모습은 ‘지식의 보고요, 세상의 거울’ 이라는 책이 아주 생생하게 묘사해준다. 독자들은 상상했던 그들의 모습을 책을 통해 다시 확신한다. 하지만 이 때 독자들은 그들을 ‘우리와 다르게 사는 사람들’ 이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덜 떨어진 사람들’ 이라 판단했다. 독자들은 인류학자들과는 달랐다. 인류학자들은 알량한 체면 때문에라도 아프리카인들을 대놓고 웃지는 못했지만, 독자들은 맘껏 비웃어도 된다. 자기들과 다른 삶의 방식은 우습고,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여겨도 독자들에게는 아무 책임이 없다. 따스한 햇살아래, 고풍스런 양산에, 꽃과 깃털이 달린 모자를 살짝 삐딱이 쓴, 그리고 촌스럽게 펑퍼짐하니 퍼진 치마를 입은 어느 숙녀 분께서는 벗고 거리를 다닌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리에 얼굴을 붉혔을 것이다. 그리고 어디 가서 손으로 입을 가리며 교양 있게 ‘호호’ 웃으며, 저 쪽 아프리카 사람들은 무식해서 옷도 안 입고 산다며 수다를 떨었겠지. 웃을 때 눈가에 지는 그 주름에는 무식한 것들에 대한 업신여김과 인간 같지도 않은 사람들에 대한 경멸을 가득 담았을 것이다. 인간 같게 살지 못 하는 그 들을 어여삐 여긴 어떤 이들은 이제 그들을 ‘구원’ 하러 아프리카로 향한다. 선교사들은 벌거벗은 것은 야만적이라며 그들에게 옷을 가져다 준다. 그들이 벌거벗은 것은 ‘그들에게 옷이 없기 때문’ 이라고 착각하면서 말이다. 서아프리카 어떤 마을에서는 선교사들이 나눠 준 옷으로 병을 얻어 마을 주민이 무더기로 죽어 나갔다. 그 곳에는 옷에 붙어, 병을 옮기는 작은 해충들이 득실거렸고 이를 모르던 선교사가 주민들에게 강제로 옷을 입혔다가 벌어진 비극이었다. 

 

과거 유럽에서 벌어진 일들이었다. 지금도 유럽이 저러는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아직도 저러고 있다. 과거 유럽 유럽이 아프리카를 깔보며 우습게 보던 모습들은 현재 우리 일상에 그대로 남아 있다. 아프리카에 관한 TV 다큐멘터리를 보면, 일단 거기는 동물의 왕국이다. 인간들은 없다. 오로지 동물들만이 서로 먹고 먹히며, 생존에 여념이 없다. 그나마 몇 개 없는 인간들에 대한 다큐멘터리에서는 괴성을 질러대며 껑충껑충 뛰며 춤 같지도 않은 춤을 춤이라 우기는 사람들과 사자 사냥, 그리고 염소 피를 서로 나눠 마시는 모습이 나온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벗고 있거나 천 몇 쪼가리로 겨우 몸을 가리고 있다. 아프리카가 왜 발전되지 못 했냐는 질문에 어떤 똑똑하신 분들은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아프리카는 원래 기후가 먹고 살기에 좋아서, 그들이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자급자족을 통해 해결됐다. 그래서 아프리카 사람들은 게을러지게 되었고, 그 생활 습관이 아직까지도 남아서, 아프리카는 현재도 옛날 모습 그대로이다. 그래서 발전이 안 됐다.”

 

그에게 아프리카가 유럽에게 당한 착취를 암만 이야기 해 준다 해도, 그가 생각을 바꾸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에게 발전하지 못한 아프리카는 순전히 아프리카의 기후와 선천적으로 게으른 그네들 탓일 뿐이다.

 

언젠가 한국의 한 대학교에서 아프리카 음악을 연구하는 학생들이 어느 행사에 참여하여, 아프리카 음악을 선보일 일이 있었다. 행사는 세계 각국의 음악, 춤 등을 소개 하는 행사로 세계의 음악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었다. 주최 측은 무대에 올릴 팀을 선별하기 위해 오디션을 열었고, 아프리카 음악 팀은 오디션부터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에, 케냐에서 직접 공수한 케냐 전통 의상을 입었다. 이날 아프리카 음악 팀에게 한 오디션 담당자의 말은 우리가 아프리카를 얼마나 잘못 알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다 좋은데, 의상이 좀 걸립니다. ‘아프리카면 아프리카답게’짐승 가죽 무늬 뭐 그런 거 입어야 하지 않나요?”

 

오디션 담당자에게 아프리카다운 아프리카는 짐승 가죽을 입은 아프리카였다. 그 곳에서 직접 가져온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무늬들은 그의 상식에 어긋나는 아프리카였다. 그래서 진짜 아프리카 전통 옷을 보며, 아프리카답지 못한 의상이라 한다. 결국 그 팀은 불행히도 표범 무늬가 그려진 천을 동대문에서 구해 옷을 만들어 입었다. 진짜 아프리카 전통 의상을 두고도, 사람들에 맞는 아프리카를 만들어내기 위해, 표범 무늬 천을 동대문에서 구한 재미있는 이야기다. 어쩌면 그 팀이 사람들 머릿속에 있는 아프리카를 연출하기 위해 그들의 입맛에 맞는 아프리카를 연출했듯이, 다큐멘터리 관계자들 역시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아프리카를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짐승들을 찍어대는 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아프리카 민족이어야 한다. 그들에게도 분명히 역사가 있다. 자랑스러운 역사도 있고, 부끄러운 역사도 있다. 아프리카 땅이 유럽의 지배하에 있던 시절,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독립을 위해 싸웠다고 하면 믿겠는가? 우리가 과거 일본에 저항했던 것처럼, 그들도 똑같이 싸웠다. 오히려 일본 침략 시, 우리가 그대로 나라를 갖다 바친 꼴로 빼앗긴데 반해, 적어도 그들은 창, 칼을 들고 유럽의 침입에 맞서 싸우기라도 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도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항해 싸우다 죽은 우리 청년들처럼, 아파르테이트 정권에 대항하다 죽어간 수많은 청년들이 있었다. 우리가 민주 투사라며 그 죽어간 청년들에 대해 안타까워하듯이 그들 역시 민주화를 위해 피 흘려 죽어간 청년들에 똑같이 안타까워한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사회를 가지고 있고,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사람이다. 전혀 우습지도, 덜 떨어지지도 않았다. 언제까지 아프리카에는 동물들만 득실거리고, 거기 사람들이 미개하다고 생각할 것인가? 사회 진화는 없다. ‘변화’ 라는 단어를 쓴다면, 그리고 그 변화를 ‘역사’로 표현한다면 나는 고개를 끄덕 끄덕할 것이다. 아직도 사회는 진화하고 발전 한다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 질문에 대한 그들의 대답이 궁금하다.

 

‘발전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과연 인류는 발전했는가? 무엇을 보고 발전했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고고학계에서 이야기하고, 중 고교 역사시간에 배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원인이 최초의 인류라면, 우리는 분명히 이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아프리카의 시간은 세계 어느 대륙보다도 길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냥감에 독침 하나 꽂아 두고, 쓰러질 때까지 쫓아다니는 모습이 과연 우스운가? 그들은 그런 사냥 방법 덕에 무식하게 사냥감과 피를 흘리며 싸울 필요가 없다. 게다가 그들은 아마 그 한 번의 사냥으로 적어도 몇 날 며칠은 포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습게 보이는 그들의 행동에 그들 나름의 소중한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네는 남들이 개고기 먹는다며 한마디 하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라 들면서, 왜 남의 문화에는 저질이네, 야만적이네 하며 시비란 말인가? 혹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발전이라는 개념은 서구 사회처럼 되는 것은 아닐까? 서구 사회와 같은 모습에 가까울수록 그 사회는 발전하였다 평가 받고, 그렇지 않으면 덜 발전하였다 평가 받는 것은 아닐까? 진화란 없다. 역사가 있다. 진화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변화라면 역사란 다양성을 인정하는 개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프리카에는 부족이 없다. 거기에도 똑같이 민족이 있다.

 

어린 학생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종종 있다. 지구의 꼭대기가 어디냐 물으면 ‘북극이요.’참 귀엽게도 대답한다. 난 그들에게 지도를 한 번만 뒤집어 보라고 이야기 한다. 어린 친구들에게 지도를 뒤집어 놓고 다시 물으면 이제는 대답이 둘 중 하나로 바뀐다. 북극과 남극. 지도를 옆으로 돌려놓으면 북극과 돌려놓은 지도에서 위에 있는 부분이라 대답한다. 희한하게 아무리 지도를 이쪽으로, 저쪽으로 돌려놓아도 ‘북극’이라는 대답은 꼭 나온다. 어디서 듣기에 지도 상 북반구가 남반구 위쪽을 차지하게 된 것은 유럽 열강들이 북반구에 있기 때문이라 한다. 사실 남극을 위에 그려 넣은 지도는 여태 한 번도 보지 못 했다. 유럽이 참 대단하긴 대단하다. 이 어린 친구들 머릿속에 까지 자기네가 위에 있다고 집어넣은 걸 보면 말이다. 지구본을 틀에서 떼어내 몇 바퀴 휘휘 돌린 후 어린 친구들에게 보여줘도 지구의 꼭대기는 북극이라고 대답하는 친구들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생각을 조금만 달리하면, 지구라는 별은 위가 없는데 말이다.

 

난 지금 그 친구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이 자기네가 생각하는 위는 ‘북쪽’이 아니라 ‘유럽이 있는 북쪽’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나이가 되길 기다릴 수밖에.

 

 


 

 

<쪼콩>

 

오늘은 남아공 이야기가 아니라 '쪼콩 칼럼' 입니다^^

 

아프리카를 판단하는 우리의 생각을 반성해보자 하는 의미에서 적어보았습니다^^

 

여기 2africa에 사회 진화론자는 없으시겠죠?^^

 

혹시 인류학자는 없으시죠?

 

너무 씹어놨더니 혹시 회원중에 계실까 겁나네ㅋㅋㅋ

 

혹시 계시다면, 님은 위 이야기에 해당 안돼요..ㅋㅋ(인기관리 하냐?--;;)

 

그럼 내일 또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