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토니 집에서 자고 일어난 아침, 바깥에서 뭔가 계속 부스럭 부스럭 하는 소리가 났다. 시계를 보니8시다. 어제 들은 바로는 지금 이 시간에 집안에 있을 사람이라곤 가정부 '에뜰' 뿐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문 앞에 섰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지금 바로 문 맞은편에서 들리고 있다. 이 문을 열면 오늘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 요 며칠 동안 새로운 사람들을 넘치고, 넘치도록 만났건만, 이는 여전히 설레고 긴장되는 일이다. 흑인 친구라고 했으니 여기 말인 줄루어(Zulu)로 인사를 해볼까? 문을 열었다. 조그마한 키에 제법 통통한, 스무 살 이쪽저쪽으로 되어 보이는 처녀가 열심히 걸레질을 하다가 나를 본다.
'사우보나!(Saubona)'
학교 다니며 줄루어를 배우긴 배웠다만 기억나는 거라곤 '안녕' 이라는 뜻의 '사우보나' 뿐이다. 에뜰은 웃으며 아침 인사를 하고 라쉬르가 준비해 둔 아침을 내어 준다.
가정부를 둔 다른 집들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에뜰은 온갖 집안일은 다 해도 요리는 하지 않는다. 빨래와 청소를 주업으로, 가끔 토니 부부의 막내딸 쉬리아가 유치원에 가지 않는 날엔 미리 안주인이 준비해둔 샌드위치를 쉬리아에게 먹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 장면이 보고 있는 사람으로는 여간 우스운 게 아니다. 어린 아이는 매일 아침마다 먹는, 맛도 없는 샌드위치를 안 먹으려 이리 저리 도망 다니고, 에뜰은 한입이라도 더 먹이려고 그 뒤를 열심히 쫓아다닌다. 어쩌다 짜증난 에뜰이 큰 소리라도 내면, 쉬리아도 지지 않고 큰 소리로 안 먹겠다고 반항이다. 네 살짜리와 스무 살짜리의 전쟁은 항상 스무 살짜리의 승리로 끝이 난다. 쉬리아는 입을 앙 다물고, 양 볼에 잔뜩 바람을 넣어 부풀리며 까지 반항하지만 에뜰은 기어코 샌드위치를 쉬리아의 입에 넣고 만다. 에뜰은 참 부지런한 친구다. 나중에 집을 옮겨 지낼 때, 그 집에 있던 가정부와 비교하면서 그녀가 부지런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발을 놀리며 집안을 돌아다닌다. 그런 에뜰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자 열심히 비질도 걸레질도 하지만, 결국 내가 손 댄 곳은 에뜰이 다시 손질하고 다듬어야만 했다.
그런 에뜰에게 남자친구가 있다. 토니가 빵 납품하러 다닐 때, 옆에서 돕는 조수, ‘시프리안’이라는 친구이다. 시프리안은 비쩍 말라 보이지만 팔뚝에 붙은 근육이며, 탄탄한 몸매가 남자다움을 물씬 풍긴다. 그렇게 멋지게 생겨서 인지 이 친구가 제법 바람둥이란다. 어찌나 바람둥이 인지, 이미 에뜰과 이 친구 사이에 애기가 둘이나 있는데도, 여기저기 다른 여자 만나는데 열을 올리더니, 급기야는 에뜰의 여동생과도 눈이 맞아 떡 하니 애까지 하나 생겨버렸다. 에뜰 입장에서는 기가 차고 환장할 노릇이다. 에뜰은 이 사실을 불과 며칠 전에 알았고, 그래서 둘 사이엔 찬바람만 쌩쌩하고 분다. 그런데 이 바람둥이 친구는 여전히 에뜰을 사랑하는 모양이다. 어쩌면 연인에 대한 소유욕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와 에뜰이 방에 같이 있을 때면 신경을 곤두세운다. 청소 도구가 내 방 침대 밑에 있는 까닭에 그녀는 끊임없이 내 방을 들랑날랑 해야만 했고, 그녀의 다림질 장소도 내 방이었다. 그녀가 방 청소를 하든, 청소 용구를 가지러 들락거리든, 다림질을 하든, 난 항상 내 할 일에 바빴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영어 공부를 하거나 했다. 이렇게 방안에선 서로가 각자 일에 열심인데도, 시프리안 녀석은 마당을 쓰는 척 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고, 쓸데없이 나를 불러 내, 날씨가 좋으니 바깥에 나와 있으라는 둥 이야기한다. 사실 난 그녀가 내 방에 있었다는 사실 조차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느 날, 근처 동네에서 살인 사건이 있었다. 여자가 바람을 피자, 애인이 그녀와 그녀의 남자 친구를 총으로 살해하였다 한다. 사랑이라는 것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고는 하지만, 이건 해도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잖아도 치안이 불안정한 남아공에 겁을 먹고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난 며칠간 꼼짝 못하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런데 나라고 아주 안전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 심각하게 보이지는 않아도, 나는 두 남녀 사이에 묘하게 끼어 있었다. 언제 시프리안이 달려들어 내게 총질을 할지도 모른다 생각하자, 시프리안도 에뜰도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이젠 방에 에뜰이 들어오면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 근처 산책을 하거나, 재미도 없는 텔레비전을 보러 거실로 나갔다. 시프리안이나 에뜰이나 다 착하고, 좋은 친구들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렇지만 뉴스를 보면 하루에도 총기 사건이 빠지는 날이 없었고, 바로 윗동네에서는 연인들의 삼각관계로 인해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런 사회의 모습은 그 좋은 친구들조차도 믿지 못하게 했다. 시프리안이 비록 가난하다고는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권총 한 자루쯤은 구할 수 있다고 한다. 나중에 안 사실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원칙적으로는 총기 소유가 자유롭지 못 하다고 한다. 총기를 구입하려 할 때는 허가를 맡아야만 구입할 수 있으며, 그렇게 구입한 총기 보관도 법이 정한 법규대로 해야만 한다. 그러나 도처에는 불법 무기가 널려 있고, 만난 친구들 중에도 허가 받지 않은 총을 가지고 있다며 자랑스레 이야기하는 이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총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 중에 총들이 어디서 어떻게 공급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친구는 없었다. 그저 조직적인 갱스터들에 의해 공급된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더 황당한 이야기는 총이 대여가 된다는 것이다. 한국 돈으로 5만원 정도면 하루 대여가 가능하단다. 이 정도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시프리안이 어느 날, 나와 에뜰이 같은 방안에 있는 것이 보기 싫어, 날 죽이고 싶어진다면 밖에 나가 총 한 자루 대여하면 된다. 사정이 이래 놓으니 이래저래 시프리안과 에뜰을 보기가 갈수록 힘들어 졌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토니는 혼자 집안에 있을 때는 시프리안이라 할지라도 현관문을 절대 열어주지 말라 한다. 시프리안 뿐만 아니라 에뜰을 제외한 어느 흑인이 오더라도 문을 열어주지 말라 신신당부 했다. 대부분 가정 현관문은 항상 이중 삼중으로 잠겨 있다. 거기에 현관문 바깥쪽에 철창살 덧문이 하나 더 있어 이 덧문의 잠금 장치는 현관문보다 더 견고하다. 날이 더워 현관문을 열어 놓는다 해도, 바깥쪽 덧문은 꼭 잠가 놓는다. 바깥일을 주로 하는 시프리안은 토니나 집안사람과 이야기를 할 때, 잠긴 덧문 밖에 서서 이야기를 나눴다. 굳게 닫힌 문은 시프리안게 절대 허락되지 않았다. 아니 흑인들에게 특히 흑인 남자들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그런 토니의 말이 내게는 곧 법이었다. 시프리안을 포함한 모든 흑인은 그저 내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시프리안과 함께 시내 구경을 나간 적이 있었다. 학교에 볼 일이 있는데, 나 혼자 보내기에는 토니가 많이 불안했나 보다. 그래서 그는 시프리안을 내게 안내원으로 붙여 주었다.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가 버스를 한번 갈아 타야한다. 둘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주로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시프리안은 주로 자기 가족들과 사는 곳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러다가 그가 갑자기 물었다.
“너 에뜰을 어떻게 생각해?”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했다. 보디가드가 알고 보니 의뢰인을 살해하고자 고용된 청부 살인업자였다는 어느 영화인지 책인지의 내용이 떠올랐다. 지금 주위에는 날 보호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아니 날 보호해주라고 토니가 붙여준 이가 내게 가장 위험한 사람처럼 보였다. 시프리안이 나를 이상한 골목이나 타운쉽으로 유인해 일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저 질문에 숨이 덜컥 막힐 정도였다.
“물론 좋은 친구지.”
“애인으로는 어때? 제법 괜찮은 여자야.”
“어이, 친구! 난 전혀 관심 없어. 난 한국인이 좋아.”
다행히 별일 없이 학교에 잘 다녀왔고, 녀석은 더 이상 이에 대해 별 이야기도 없었다. 이후로도 다른 집으로 옮기기 전까지 한 달여 간은 에뜰과 시프리안 사이에서 잔뜩 긴장한 채 보내야만 했다.
가슴 아픈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현실이었다. 극도로 불안정한 치안은 이렇게 가까운 친구마저도 일단은 거리를 유지하게 만들었다. 상대가 언제 뒤통수를 칠까 하는 염려 정도가 아니라, 언제 총칼을 들이밀고 내 생명을 위협할 지도 모른다는 염려였다. 그들에게는 함부로 문도 열어주지 못 한다. 이는 흑인 인권을 위해 평생 몸바쳐온, 그래서 개인적으로 존경해 마지않는 넬슨 만델라 (Nelson Rolihlahla Mandela)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실수라고 이야기 하는 이들도 있다. 과거 아파르테이트(Aparthad) 시절에는 강력한 경찰력으로 인해 범죄에 대한 걱정이 없었다 한다. 물론 그 강력한 경찰력이 흑인들을 짓밟는데 쓰이긴 했지만 덕분에 도둑이나 강도도 별로 없었다 한다. 그래서 옛날에 지어진 주택들은 대부분 담장이 낮다. 아파르테이트 시절에 지어진 건물들은 알아보기 쉽다. 담장은 낮지만 그 위에 쇠창살이나 철조망을 억지로 높게 올린 집들은 대부분이 그 때 지어진 집들이다. 전에는 담장이 낮아도 괜찮았으나 시국이 불안정해 지니 급히 창살과 철조망을 올린 것이다. 높아진 담장과 철조망만큼 높아진 것이 또 하나 있었으니 그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이 아닌가 한다. 시프리안은 내게 참 고마운 친구임에 틀림없다. 토니가 부탁하긴 했어도, 그는 나를 학교까지 데려다 주고 오고, 말 한마디를 하여도 따뜻하게 하였다. 근처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만 없었다면, 에뜰에 관한 시프리안의 이야기는 어쩌면 농담으로 흘릴만한 가벼운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와 행동 하나 하나에 잔뜩 긴장해야만 했다.
어릴 때, 동네 개 한 마리가 내게 꼬리 흔들며 좋다고 따라오다가 갑자기 이빨을 들이밀고 덤벼들었던 경험이 있다. 으르렁대는 소리 하나 없이 느닷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꼬리를 흔드는 모습에 안심하고 있었기에 더 놀랐다. 그 뒤로 개가 뒤에서 따라오면 일단은 불안하다. 자꾸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며 되도록이면 쫓아내려고 한다. 시프리안의 그 웃는 모습과 친근한 모습에서 어쩌면 난 그 개의 모습을 읽어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가 그런 의도가 전혀 없이, 순수한 호의와 친절로 대한 것이라면 난 그에게 무척 미안하다. 하지만 변명하자면 남아프리카 사회에서 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겠다.
날 그렇게 떨게 했던 시프리안과 에뜰. 그 둘은 결국 헤어졌고 둘 사이의 애들은 에뜰이 혼자 키우고 있다.
사실 제가 여기 올리고 있는 이야기들은 나름 순서대로 쭉 정리가 된 이야기들입니다.
혹시 어디에 내 보일일이 있으면 순서대로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정리를 해 두었지요^^
그런데 이 곳 2africa에서 조차 딱딱하게 정리된 순서에 따라 올리려니 제가 쪼금 지겹네요.
그래서 내 맘대로, 저 뒤쪽에 있는 이야기를 갖다 올렸습니다.
앞으로도 순서 맘대로 재미있게 올려드리지요.
혹시, 중복된 내용이 나온다면ㅋㅋㅋ
쪼콩이 마구잡이로 이것저것 올리다가 실수했구나 생각하며 씹어 주시고, 욕해주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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