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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진~posted Dec 07, 2007

 

 

 

뭐 별로 새로울 것도 없는 풍물일지도 모르지만...

 

 

 

1. 양봉-서북쪽 기셍이로 가는 길의 유카립투스 나무에 많이 매달려있는 벌굴 채집통. 꿀을 무지 좋아라 하는 나지만 아프리칸 냄새 같은 강한 냄새나는 여기 자연산 꿀은별로다.

 

 

 

2. 닭- 잔뜩 웅크리고 있는 지붕 위 닭 신세나 잔뜩 찡겨 탄퍼블릭 택시(여기서는 승합차를 택시라고 부른다.) 안의 사람이나 비슷비슷한 포즈일 듯. 달ㄹ는 차 안에서 찍느라..

 

 

 

3. 소 주의- 많은 주의 표지판이 있긴 하지만...동쪽 키붕고로 가는 길에 유난히 많이 보이던 소! 주의 표지판..사슴 주의 표지판 보다 낭만적이지는 않지만, 암튼 뿔 엄청 큰 소떼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차는 못 지나감..

 

 

by 멋진~posted Nov 20, 2007

 

 

한 선배 선교사님이 그러셨다.

 

현지에 십년은 살아야 '선교'의 '선'자라도 말할 수 있다고...

 

그런데 감히..1년 좀 넘은 내가 뭔 말을 할까?

 

....만은...뭐 생각이야...말할 수 있겠지?

 

 

 

내가 느끼는 아프리카에 대한 사람들의 어쩐지 대립되는 생각들..

 

하나, 많은 사람이 가고 싶어하는 곳 아프리카, 그렇지만 살고 싶지는 않은 곳.

 

       지면의 한계라 억양을 살릴 수는 없지만..

 

       "어머~아프리카에 살아요?" "가고  싶다. 그런데, 살 수 있어요?" ㅠㅠ.

 

        다 사람 사는 세상이지요... 

 

다른 하나, 많은 사람이 그들 아프리칸이 잘 살게 되기를 바라지만, 

 

         자신이 도울 곳으로서의 아프리카는 여전히 불쌍한 구석이 있어야 할 것 같은... 

 

          (아,  반대되는 생각이 혹 있으셔도 조금 양해를...구하는...) 

 

          이곳의 사람들이 셀폰을 가지고 있다고 했더니, 그저 그것으로 이들이 모든 부를 다 가진듯...이해해버리는..사람들..'아니, 유선 전화기가 없거든요.' '아니요. 그게 비프 대신이거든요. 아니요', '아니요...'

 

 

 

생각의 차이... 그 갭을 줄여볼 수 있을지...

 

다시 그 아프리카 르완다로 돌아갑니다.

 

모두에게 평안이 넘치시길...

 

by 깜찌기posted Feb 05, 2007

 

 

 

갑자기 눈이 떠 졌다. 꿈을 꿨나보다. 워낙 꿈을 잘 꾸는 편인데 여기서는 안꾸길래 좋아라 했다. 무슨 꿈인지 기억은 안나지만 뭔가 쫓기는 장면이 어렴풋이 기억난다. 시계를 보니 아침 8시였다. 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늦게 일어났다. 비록 4일밖에 안됐지만 열심히 돌아나니는 바람에 피곤했나보다. 잠이 잘 깨지질 않았다. 오늘도 역시나 아침부터 덥다. 침대에서 여유부리다가 1시간을 그냥 보내버렸다. 아까워라~~

 

아침식사를 하러 갔는데 7시가 넘으면 전기가 끊기던 호텔에 전등이 다 켜 있는거다. 물어봤더니 일요일에는 종일 전기가 나온다고 한다. 그 이유는 정부만 알겠지.  머~ 암튼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아침을 먹었다. 목이 타서 음료만 계속 먹은 거 같다. 이렇게 마냥 먹다가는 살이 디룩디룩 찔거 같다. 오늘부터 소식을 하리라. 

과일 중심으로 식사를 마치고 어김없이 숙소 정리를 했다. 깔끔떠는 게 아니라 방을 바꾸기 위함이다. 지난 3일동안 더불룸에 머무면서 지출이 생각보다 많았기에 싱글룸으로 방을 바꿨다. 가격 차이는 7천실링으로 식사 3끼 정도 금액이기 때문이다. 싱글룸에도 있을건 다 있었다. 냉장고, 에어컨, TV. 더불룸과 별 차이가 없어서 좋았는데 화장실과 세면장을 공동으로 사용해야 한단다. 그게 조금 걸리지만 여기서 내내 머물건 아니기에 신경쓰지 않았다. 어느새 짐정리가 습관이 되어버렸는지 정리하는데 시간은 오래걸리지 않았다. 뚝딱 해치웠다. ㅋㅋ 여기온지 4일밖에 안됐지만 느는 건 짐 싸기와 돈 쓰기다.ㅎㅎ...

 

짐을 옮기고 일요일이어서 예배를 드리고자  시내 교회로 이동했다.  지금 가는 교회는 지난번 시내에서 숙소로 돌아오다가 발견한 곳이다.  몇시에 예배가 시작되는 지 모르지만 그냥 출발했다. 도착하니 10시 반쯤 된 거 같다. 교회에 들어가니 이미 예배가 진행되고 있었다. 참석인원이 200명은 넘어보였다. 꽤 큰 교회란다.  예배 내용이 스와힐리어다 보니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광고를 하고 누군가가 나와서 기도를 한다. 예배 중에 나는 옆에 있는 꼬마친구랑 사진을 찍었다. 옷이 좋아 보였다. 좀 사는 집 아이같다. 

어떤 사람이 나와서 광고를 하고 종이를 교인들에게 나눠주길래 나도 받았다. 교회 건출을 위한 후원을 요청하는 것 같았다.  나는 돈이 없는 관계로 종이만 감사히 챙겼다. 

설교는 언제부터 시작하는지 모르겠다. 이미 설교말씀 시간이 끝났는지도 모르겠다. 안되는데.. 어차피 들어도 모르겠지만 교회를 다니는 나로서는 설교는 꼭 들어야 하는 마음이 있다.  이번에는 새로온 사람 환영하는 시간인가보다. 몇 몇 사람이 일어났고 교인들 대부분이 갑자기 우리를 쳐다봤다. 우리도 새로 왔으니 일어나라고 암묵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나는 당황했지만 차마 일어날 수 없어서 그냥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마치 미스코리아처럼.. 그들이 환하게 미소로 답례를 해줬다. 그러면서 계속 쳐다보는데 끝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부끄러워서..그리고 앞으로 나오게 해서 말 시킬까봐..>.<

 

예배를 다 마치고 나니 12시 반이었다. 밥을 먹으러 갈까 하다가 아는 현지인 집에 놀러가자는 말에 주저하지 않고 따라 나섰다. 달라달라를 타고 어느 동네에 도착했다. 기억을 더듬어 현지인 집에 도착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동네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니 어머니는 안계시고 딸은 결혼해서 다른 동네에 산다는 얘기를 전해주었다.  딸이 사는 곳에 데려다 주신다는 아주머니 말에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따라 나섰다. 꽤 걸었던 거 같다. 

날은 덥고 다리가 아팠다. 얼마나 걸리냐고 물었더니 금방 도착한다길래 믿었다. 우리나라의 ‘금방’과 아프리카의 ‘금방’의 의미가 아주 많이 다르다는 것을 가슴 깊이 느꼈다.  

드디어 도착했나보다. 다시 찾아가라면 절대 못올 동네... 내가 길눈이 어두운지라..ㅋㅋ

 

아주머니와 함께 도착한 곳은 딸과 남편이 함께 사는 집이었다. 집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좁은, 그냥 방 한칸, 밖에 옆집과 공동으로 사용하는 부엌같은 공간이 있었다. 문을 두두리니 딸이 남편과 함께 있었다. 잘 찾아왔나보다. 너무나도 반갑게 우리를 맞은 부부를 보니 괜치 반갑고 좋았다. 

딸의 이름은 네마(Neema 은혜)였다. 이런 저런 대화를 하면서 친분을 쌓아갔다. 나이를 물어보니 남편은 25살, 네마는 이제 20살 정도였다. 내 나이를 얘기했더니 무지 놀란다. 어려보인다면서 나를 칭찬했다. 흐미~ 사람들의 눈은 비슷한가 보다. 어려보인다는 얘기 여기서 원없이 듣는다.^^

 

 

어려운 형편인데도 손님을 접대한다고 소다 음료를 사다 주었다.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기에 고마운 마음으로 거절하지 않고 마셨다. 옆집에 사는 자매와도 인사를 나눴다. 그 중 언니는 자녀가 한명 있는데 남편이 얼마전에 죽었단다. 마음이 아팠다.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쓸쓸하고 마음이 아파보였지만 엄마이기에 씩씩했다. 그 모습이 고마웠다. 씩씩하게 잘 살아줘서~

한참을 대화하는데 배가 고팠다. 원래 계획은 잠깐 인사만 하고 시내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는데 우리가 배 고픈지도 알고 우리에게 맛난 것을 해 주겠다면서 우갈리를 만들어 준단다. 살짝 고민을 했다. 우갈리를 만드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걸리기 때문이다. 다른 일정에 차질이 있겠지만 일요일이기도 하고 또 언제 이렇게 직접 만들어 주는 우갈라리를 먹어보겠는가...우리는 다음 일정을 포기하고 우갈리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우리에게 우갈리를 만들어 주고자 남편에게 부탁해 옥수수 가루를 사오게 했다. 본인들도 힘드면서 꼭 대접하고 싶다고 말하는 네마와 남편. 어쩜 이렇게 마음이 따뜻하고 친절할 수 있을까? 부부의 따뜻한 마음이 나를 감동시켰다. 옆집 자매가 옥수수 가루를 물과 섞어서 화로불에 계속 끌이고 있는 사이 네마는 소스를 만들었다. 토마토와 양파, 기름등을 이용해 소스를 만든다. 우갈리를 만드는 동안 참 많은 대화를 했다. 사실 대화가 잘 통하지는 않았지만 그건 정말 상관없었다. 감정과 마음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또 한번 깨달았기 때문이다.  마음 씀씀이가 무척 이쁜 네마. 아이를 가지려고 노력중이란다. 안타까웠던 것은 얼마 전 고된 일로 인해서 아이를 한번 유산했다고 한다. 마음이 아팠다. 오늘 여러번 마음이 뭉클해 지면서 쓰라렸다. 곧 좋은 소식이 있을거라고 위로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거 밖에 없었다. 

 

옥수수 가루가 쫀득해 질때까지 계속 저어야 한다. 나도 한번 해보고 싶은 마음에 말을 건냈더니 나는 너무 연약해서 할 수 없을거라고, 젓는것이 굉장히 힘들다고 얘기했다. 그 말에 나이도 내가 많으니까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덤볐다. 한 두바퀴 저었을까? 정말 힘들고 팔이 아팠다. 나의 그런 모습을 보더니 거기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한다. 못할거라는 걸 알았다는 듯이.. 오메~ 나의 행동으로 그들이 웃을 수 있었기에 기분은 좋았다. 우갈리도 완성되고 소스도 다 완성되었다. 아프리카 전통 음식, 우갈리를 체험하는 절대절명의 순간이다. 우갈리가 완성된 모습은 하얀 빵 같았다. 먹기 전에 못 먹겠으면 안 먹어도 된다는 네마의 말에 살짝 긴장했다. 우갈리를 식혀서 토마토 소스에 찍어 먹었다. 오오~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정말 맛있었다. 내가 맛있다고 하니까 특이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외국사람이 먹기에는 조금 싱겁고 맛 없을수도 있었을텐데 맛있게 먹는 나의 모습에 네마도 행복해했다. 우갈리로 늦은 점심(3시 30분)을 먹으면서 더 많은 대화를 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마냥 즐거운 오후를 보낸거 같다. 오후 시간을 이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더할나위 없이 행복했다. 그들도 행복했었으면 좋으련만~ 헤어질 시간을 앞두고 사진을 찍었다. 내가 가져간 폴라로이드로 사진을 찍어 그들에게 작은 선물로 주었다. 우리는 서로 고마워했다. 

 

부부가 버스 타는데까지 배웅을 나왔다. 가는길에 뭔가 대접을 하고 싶은데 돈을 줄 수는 없고 해서 쌀과 옥수수 가루를 사주기로 했다. 네마한테는 우리가 필요하다면서 쌀과 옥수수 가루를 살 수 있는 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다행히 가는 길목에 있었다. 쌀과 옥수수 가루를 잔뜩 샀는데도 10,000실링이 넘지 않았다. 물가가 우리나라보다 저렴하긴 한가보다. 쌀과 옥수수가루를 사서 버스 타는데로 이동했다. 헤어질 인사를 하고 내 명함을 주었다. 비록 연락은 하지 못하겠지만... 그리고 쌀과 옥수수 가루를 건내줬다. 안받겠다고 완강히  거절하는데 내 마음의 표시라면서 건냈다. 사실 네마에게 제발 받아달라고 부탁했다.~ㅋ 나의 이런 모습 때문인지 더 이상 거절하지 않고 기쁘게 받아줬다. 고마웠다. 

 

달라달라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잠깐의 휴식시간을 갖고 가져간 자료를 가지고 스와힐리어 공부를 했다. 현지인과 만나다보니 대화가 안되는 것에 마음이 좀 어려웠다. 잠깐의 공부가 얼마나 도움이 될런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국에서 스와힐리어 기초는 익혔던 터라 다행이었다. 가져간 자료가 굉장히 도움이 많이 되었다. 스와힐리어 자료(나와 Africa가 2005년 스와힐리어 강좌를 개설하면서 수많은 강의를 통해 완성된 자료이다. 땀과 노력이 담겨있는 이 자료가 책으로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이 있다)를 통해 2시간 정도 열심히 공부했다. 어찌나 집중도 잘 되던지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가만보니 언어에 대한 감각이 뛰어난 거 같다. 조금만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공부한다면 스와힐리어로 대화하는 그 날이 멀지 않을 것이다. 곧 오리라~^^

 

8시가 훌쩍 넘긴 시간에 저녁을 먹었다. 멀리 가기도 귀찮고 내일 은좀베를 가는 것 때문에 짐을 싸야하기에 호텔 식당으로 갔다. 매일 아침만 먹다가 저녁을 먹는 거는 처음이라 어떻게 식사가 나올 지 모르겠다. 뭐 다른데하고 비슷하겠지~ 호텔 식당은 저녁엔 주로 바로 이용하나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나도 갑자기 맥주가 확~ 땡기길래 후라이트 치킨하고 맥주를 시켰다. baridi(차가운) 한걸로~ 음악을 들으며 맥주를 마시며, 마치 독일의 한 호프집에 온 것같은 느낌으로 저녁시간을 즐겼다. 맥주 맛도 좋았다. 내가 마신 것은 ‘킬리만자로’라고 외국인들이 주로 마시는 맥주란다~ 현지인이 먹기에는 조금 비싸서리~ 

 

식사도 다 하고 다시 숙소로 올라와서 짐을 쌓다.  은좀베에서 하루만 머물 예정이어서 간단한 옷가지로 가방을 꾸렸다. 은좀베에 가고 오는 데 이틀걸리니까 하루만 머물기에는 너무 짧고 아쉬운 일정이긴 하다. 파트너는 은좀베에 같이 합류하지 않는다. 처음으로 각자의 활동을 하게 되는 기간이었다. 혼자 거기까지 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컸지만 용기를 냈다. 그리고 꼭 한번 방문해야할 곳이기에 가게 된 것이다. 

저녁인데도 불구하고 짐을 싸는데  땀이 삐질 났다. 다 싸고 샤워를 했다. 시원한 건 잠깐이다. 샤워해도 더운 다르에살람에서 잠깐의 이별을 앞두고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하기에 잠을 청했다.

 

 

 

처음으로 혼자 버스를 타고 더반 시내에 나갔다. 동안 위험하다는 소리를 귀에 못 박히도록 들어 집 바로 앞, 슈퍼마켓에 갈 때조차도 잔뜩 겁을 집어먹고 한참을 망설인 후에나 나서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제법 간이 부었나 보다. 동안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었던 게 사실이다. 아프리카 땅까지 와서 하루하루, 종일 방 안에만 쳐 박혀 있는 건 젊음에 대한 모독이다. 한국에 있는 동안에는 하도 여기저기 잘 돌아다녀 친구들 사이에서는 마치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한다 하여 홍길동이라고 불렸건만, 요 한 달 동안 홍길동은커녕 방바닥 귀신 안 된 것이 다행이었다. 전날 저녁 술집에서, 토니와 다른 친구들이 시내와 집 위치 약도까지 그려줘 가며, 시내로 나가는 방법과 집으로 돌아오는 방법을 설명해 줬다. 비상시에 연락하라며 적어 받은 휴대 전화 번호만 해도 족히 열 장은 되는 듯싶었다. 그렇게 마음 써주는 친구들이 고맙다.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샌드위치와 차를 들고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나섰다. 버스 시간은 기사 마음대로 라니 조급해 말고 기다리라는 친구들의 말에, 내 살 던 시골 고향은 하루에 버스 세 대 들어오던 동네였다고 대답하였다. 한국에 그런 곳이 어디 있냐며 안 믿는 눈치였다. 적어도 이 동넨 내 고향 동네보다 버스는 자주 오겠지. 얼마나 기다렸을까, 부부로 보이는 백인들이 다가와 어디 가냐 묻는다. 더반 시내에 가는 길이라니 저 쪽 맞은편에서 타는 거란다. 하마터면 시내는 고사하고 생판 모르는 시골 땅에서 헤맬 뻔 했다. 버스가 왔다. 이미 버스 요금을 알고는 있었지만 버스 차장에게 말도 걸어볼 겸, 요금을 물었다. 이곳은 아직 몇몇 시내 버스에 예전 우리나라에 있던 버스 차장이 있어 요금을 받는다. 그들의 모습은 기억 속에 있는 과거 한국 버스 차장들의 그것들과 전혀 다를 바 없다. 버스 출발을 알릴 때면 버스 옆면을 두어 번 탕탕 치고, 버스가 정류장에 설 때쯤이면 미리 문을 열고 버스에 잠시 매달려 있다가 솜씨 좋게 뛰어내려 손님을 맞이한다. 문득 교련복 찢어 만든 동전 주머니를 옆구리에 차고 다니던 고향 동네의 버스 차장이 떠올랐다. 그런데 나를 반갑게 맞아준 이 차장 알고 있던 가격보다 약간 높게 버스비를 부른다. 잠깐 괘씸한 생각이 들어 따져볼까 했지만, 몇 십원 차이 안나 그냥 귀엽게 봐주기로 했다. 버스는 대체 언제 적 것인지, 문도 제대로 닫히지도 않고, 의자며 창문이며 제대로 붙어있는 게 없다. 어떤 의자는 쿠션이 찢어져 그 안에 철사 쪼가리가 삐죽이 나와 있어, 주의하지 않고 앉았다간 십중팔구 저에 찔릴 듯이 보였다. 매캐한 자동차 기름 냄새와 기사 양반이 피워대는 담배 연기가 섞여, 순간 구토가 쏠렸다. 게다가 버스 안에 있던 열 명 남짓한 승객들 중에 반 수 정도가 담배 물고서는 연기를 뿜어대고 있었다. 냄새가 좀 고약하기는 했지만, 나 역시 흡연을 하는 지라 이는 마치 지상 천국처럼 보였다. 얼른 얼씨구나 하며 담배 한대 꺼내 물고, 불을 붙였다. 그랬더니 버스 차장이 다가와 어디서 담배를 피냐고 시비다. 

 

“지금 나만 담배 펴요? 저기 저 사람들은 뭔데요?”

 

흥분하는 모습을 보며 이 차장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다. 그리고 자기도 담배 한대 주면 괜찮다 한다. 불쾌한 표정으로 담배 한대 건네니, 이번에는 로또 종이를 들고 와 번호 다섯 개만 찍어 달란다. 왜 이런 부탁 하느냐 물으니, 동양인들은 행운을 가지고 다녀서 잘 맞을 것 같아 그런다고 그런다. 

 

‘동양인들은 무슨 점쟁이라도 되는 줄 아나 보지? 너희들 주술사에게 찾아가보지 그래?’

 

 아무 숫자가 대충 불러주고 바깥 풍경에 집중했다. 기차가 지나간다. 기차 역시 겉보기에 이 버스만큼이나 낡을 대로 낡아, 굴러가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열린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머리카락을 정신 없이 흔들어댔다. 

 

뭐니 뭐니 해도 버스는 사람 구경하는 재미다. 버스 안에서 사람들 뭐하노라 쳐다보면 참말로 재밌다. 매번 신기한, 색다른 무언가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전과 똑같은 그 모양들은 나름대로 전에 보아왔던 모양들과 틀려 새로운 재미를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는 확실히 다른 풍경 하나가 자꾸 눈앞에 거슬린다. 차장이다. 이젠 아주 내 옆에 앉았다. 버스 요금 올려 받을 때부터 별로 마음에 들지 않던 치였는데, 어째 가면 갈수록 하는 짓이 꼴 보기 싫은 짓만 골라한다. 머리는 언제 감았는지 그렇잖아도 꼬불꼬불한 곱슬머리가 더 이상 엉킬레야 엉킬 수 없을 정도로 엉키고 뭉개져 있었다. 웃을 때마다 드러내는 앞니는 대문짝만큼이나 벌어졌고 거기에 담배를 얼마나 피워댔는지 치석으로 누렇게 덮여 있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때 묻지 않은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요새말로 생긴 것부터가 재수 없었다. 요금 올려 받기에, 담배 가지고 시비더니 이젠 무얼 가지고 시비일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제 물어올 말은 뻔하다. 어디서 왔느냐, 성룡이나 이소룡 아느냐. 당연히 저런 질문들이 왔고, 난 대충 성의 없게 대답하고 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이제 제발 그만 좀 귀찮게 하라는 말이 하고 싶었으나 짧은 내 영어 실력으로는 무리였다. 욕도 좀 배워야 한다 하던데, 역시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이 차장 제법 심각한 눈빛으로 에이즈(AIDS)에 대해 아느냐 묻는다. ‘예스’라 대답하자 이 친구는 한국의 에이즈에 대해 묻는다. 소수의 환자들만이 있어서 전혀 관심 없다고 대답하니, 이 친구가 노발대발하며 역정이다. 어떻게 그런 문제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느냐며 말이다. 

 

 통계만으로도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민의 20% 정도가 에이즈 또는 HIV 감염자라고 한다. TV 공익 광고에서는 끊임없이 에이즈 예방에 대해 나오고, 도시 곳곳에 에이즈 보건소가 세워져 있다. 불행하게도 이들에게 에이즈는 생활이다.

 

자세한 통계를 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얼핏 듣기에 한국에도 약 4000여 명의 에이즈 감염자가 있다고 한다. 이 수치가 에이즈 환자만인지 HIV 감염자도 포함한 것인지 아직까지도 잘 모르겠다. 물론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주위 나라들,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의 에이즈에 비하면 경미한 수준이다. 그래서 인지, 한국에 있는 동안 개인적으로 HIV와 에이즈의 차이를 모를 정도로 난 에이즈에 대해 무지했었다. 미국 전 프로농구 스타 매직 존슨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뉴스를 보며,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 있을 수 있지 하며 의아해 왔다. 그는 에이즈가 아닌 HIV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관리만 잘하면 꽤 오래 살 수 있다는 사실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 정도로 난 HIV와 에이즈에 무지하였다. 차장이 한국에는 에이즈가 없냐고 묻는다. 있다는 대답에 그들은 어떻게 하느냐 물으니 대답할 말이 없다. 모르니 할 말이 없다. 

 

이런 저런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버스는 시내에 도착하였다. 그 시내버스 차장이 혹시 에이즈 환자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떻게 에이즈에 그리 무관심하냐며 역정을 내는 모습은 마치 안타까운 절규처럼 보였다. 국민의 20% 정도가 HIV 감염자 또는 에이즈 환자라니, 이미 만난 사람들 중에도 상당수는 그러할 것이다. 이 버스 차장도 어쩌면 그 20%의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렇기에 에이즈에 관심 없다는 내 대답은 마치 자기 죽음에 전혀 관심 없다는 말처럼 들려 가슴 아팠고, 그래서 내게 노발대발하며 역정을 냈던 것일 지도 모른다. 그가 에이즈 환자였는지 아닌지는 아직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에이즈 환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가슴 아픈 일이다. 아프리카 에이즈는 학교에서 배웠던 것 보다, 말로 듣던 것 보다 훨씬 심각하다. 생각해 보라. 통계에서 발표하는 숫자들일랑 일단은 잊고, 길을 가다 만나는 수많은 사람 다섯 중 하나는 HIV 보균자 또는 에이즈 환자라고 생각 한다면 얼마나 끔찍하겠는가. 길에서 만난 다섯 중 하나가 죽을병에 걸려 있다 생각하면 얼마나 불쌍한가. 거리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측은하다. 이렇게 불쌍할 수가 없었다. 

 

해산물 시장을 둘러보며 지금껏 본적 없었던 생선들을 보다 슬펐다. 그들은 눈꺼풀이 없다. 그래서 죽었지만 눈을 덩그러니 뜨고 나를 노려보고 있다. 그 노려보는 눈빛이 ‘나는 이미 죽었다. 그대가 내 죽음에 슬퍼해 주길 바란다.’하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 이는 마치 그 시내버스 차장의 목소리와 비슷했다. 눈만 떴을 뿐 자기는 이미 죽어있는 슬픈 이야기다.

 

 

by 깜찌기posted Feb 03, 2007

 

 

셋째날 아침, 부비 부비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6시였다. 

한국에서는 정말 일어나기 힘든 시간인데 이 새벽에 일어나는 걸 보니 아프리카가 정말 내 체질에 맞나보다. 어제 인제라를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지 아직도 소화가 안된 거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을 먹으러 호텔 식당으로 내려갔다(내가 묵은 호텔은 4층이어서 내려가는 길에 소화가 다 될 것 같네~). 

어제와 다르지 않는 아침 식사 메뉴.. 그래도 좋았다. 오늘은 다행히 아침에 전기가 나가지 않았기에 호텔리어에게 얼른 토스트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드디어 살짝 구운 토스트를 먹어볼 수 있게 되었다. 

우유와 토스트, 바나나와 파파야는 나를 즐겁게 만든다. 평상시에는 아침도 잘 안 먹는 내가 여기서 꼬박 아침을 챙겨먹고 있다. 이런 내 자신을 보면서 다시 뚱뚱해 질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지만 그냥 무시해 버렸다. ㅋㅋ

식사를 다 마치고 숙소 정리를 대충하고 샤워했다. 샤워를 하고 나와도 어찌나 덥던지..

 

 

 

오늘은 유일하게 정부가 운영하는 ‘다르에살람 대학’에 방문할 예정이다. 

공식적으로 대학 공부를 할 수 있는 유일한 학교란다. 그나마 요즘 공부하기에는 상황이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현지에 계신 한국 선교사님들께서 대학을 설립하시려고 많은 준비를 하고 계신다는 얘기는 전해 들었다. 더 많은 학교가 생겨서 공부하고 싶은 학생들에게 많은 혜택이 주어지면 좋겠다. 

다르에살람 대학도 우리나라 대학 못지않았다. 솔직히 나름 선입견이 있었는데 별 다르지 않는 모습을 보고 조금 민망했다. 잔디에 앉아 토론하는 사람, 야외수업중인 사람, 대화하는 사람, 과제하는 사람까지 그 모습은 우리와 똑같은 학생이었다. 왜 다를거라 생각했을까? 역시 선입견만큼 무서운 건 없는 거 같다. 

학생들을 보니 열심히 공부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는 열심히 했지...ㅋ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더 열심히 공부했을까?ㅋㅋ 그래도 나름 장학금 받으면서 공부한 실력인데...믿을련지는 몰겠지만..쩝..

학교를 한 바퀴 돌면서 공부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살짝 했다. 정말 살짝..ㅎㅎ

동양인이 워낙 없어서 그런지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쳐다봤지만 나를 신기하게 쳐다본 게 아니기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이 학교에 재학 중인 한국인은 딱 2명이다. 한명은 대학에, 또 한명은 대학원에). 식당에도 갔는데 점심시간인지라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별로 배가 고프진 않아 소다음료만 마셨다. 나는 콜라를 좋아해서 마셨건만 한국 콜라보다 맛이 심심했다. 다행히 시원해서 먹을만 했다. 아프리카 사람들은 소다 음료를 입에 달고 산다. 하지만 시원하게는 먹지 않는다. 시원한 소다 음료를 마시려면 꼭 주문할 때 ‘baridi-차가운’라고 외쳐야 한다. 

 

투어도 끝내고 음료도 마셨겠다 시내로 이동하려고 학교 안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사람이 무지 많았다. 

시내에서 먼저 간 곳은 우붕고(Ubungo) 시외 버스터미널이다. 우붕고 터미널에서 은좀베(Njombe)행 버스 티켓을 끊었다(Njombe에는 한국 선교사님께서 초등학교와 유치원을 설립해서 사역하시는데 그 선교사님 댁을 방문(9월 18일)하기로 했다) 버스 모양을 봤는데 우리나라 버스와는 다른 모양이었다. 차 자체가 굉장히 높았다. 범죄를 예방하기 위함이라던데.. 아프리카, 특히 탄자니아에는 소매치기들이 굉장히 많아서 차가 신호 때문에 잠깐 서게 되면 그 사이 차 안에 있는 것들(사람들이 차고 있는 시계, 가방, 모자 등)을 가져간단다. 차를 탈 때 덥더라도 창문을 다 열어두면 안된다는 얘기를 들었던 게 생각났다. 

버스 티켓(9월 18일 새벽 6시)을 끊고 핸드폰을 구입하고자 시장으로 갔다. 7만실링의 거금을 주고 구입했다. 칼라가 되진 않지만 그래도 좋았다. 전화를 걸 일이 많이 없겠지만 혹시라도 일이 생길 때 아주 유용할 거 같다. 구입할 계획이 없었던 지라 여행 경비에 조금 손해가 있으리라~ㅎㅎ

핸드폰을 구입하고 나니 어느새 1시가 넘어 있었다. 배가 고프다. 밥을 먹어줘야 할 듯~

아는 분 소개로 현지 식당을 가려고 이동했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다행이 옆집에도 현지 음식점이어서 거기로 들어갔다. 내가 먹은 것은 닭고기 조림 같은거와 밥이었다. 처음으로 먹는 현지 음식이라 설레였다. 음식의 모양은 별로였지만 오우~ 맛있었다. 사실 외국 음식이 입에 잘 맞지 않아 나갈 때마다 고생을 했는데 여기는 달랐다. 애초부터 기대를 안했었기에 그런지 생각보다 너무 좋았다. 역시 아프리카가 내 체질인가보다.

한창 식사를 하고 있는데 어떤 남정네가 우리 테이블에 앉더니 말을 시작했다. 식당 안에서 과일을 파는 남자였다. 나에게는 별 다른 말을 걸진 않았지만 눈치를 보니 나를 맘에 두고 있는 듯 했다. 이놈의 인기란~~ 스와힐리어로 열심히 말을 했지만 알아듣진 못했다. 크헐~ 그 남자가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더니 과일을 한 접시 주는 거다. 그냥 주는 거란다. 고마웠다. 왜 주는지는 몰랐지만 맛나게 먹었다. 다 먹고 나서 남자가 갑자기 사라졌다. 인사도 안하고..쩝.. 나중에 듣기로는 그 남자가 내가 맘에 들어서 결혼하고 싶다고 했단다. 나에게 잘 보일려고 과일을 준건데 내가 곧 떠날거라는 말에 시무룩해져서 어디론가 사라진거라고...흐미~~ 이 얘기를 듣고 갑자기 어깨가 으쓱해졌다. 한국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이 인기~ 아프리카에서나 인정받는 나의 미모~ 조금 슬펐다...ㅋ 한국에서는 어찌 이런 기분을 느껴보랴..ㅋㅋ 

 

식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현지 조사를 위해 달라달라를 타고 어느 동네에 들어갔다. 동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그곳 사람들의 인심이 너무 좋았던 것은 잊을 수가 없다. 그 동네에서 여러 주민들과 대화를 했다. 우리에게 무척이나 관심이 많았다. 참 좋은 사람들 인 거 같다. 어떤 아저씨는 한 컵에 50실링 하는 생강차를 공짜로, 그것도 여러 번 주었다. 차마 그냥 마실 수 없어서 돈을 내긴 했지만 한사코 말리는 그분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따뜻해졌다. 동내 주민들의 도움으로 내가 알고자 하는 것들을 많이 알 수 있었다. 고마운 사람들.. 낯선 사람인데도 너무나 적극적으로 도와줬던 사람들..다음에 다시 방문할 것을 약속하고  우리는 헤어져야 했다. 이곳 주민들은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들이다. 모든 여행 일정이 다 마치고 돌아갈 때 한번 더 이분들을 만날 수 있을까? 꼭 봤으면 좋겠다.

 

 

 

시간은 어느새 5시를 훌쩍 넘겼다. 6시가 넘으면 퇴근시간과 교통체증이 심했기에 일찍 서둘려야야 한다. 달라달라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데 생강차의 여운이 입안에 가득했다. 다시 먹어보면 좋으련만..왠지 다시 가보지는 못할 거 같은 생각에 마음이 쓸쓸했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먼지를 많이 뒤집어썼기에 한바탕 씻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시간이 많이 지났는지 밖은 어두웠다. 시계를 봤더니 8시가 넘어 있었다. 늦은 시각이라 멀리 가진 못하고 호텔 바로 옆에 있는 식당에 갔다(아무래도 외국인은 밤에 돌아다니면 위험에 바로 노출되는 거다)

식당 안이 시끌시끌했다. 이유가 뭔지 봤더니 우리가 간 식당을 빌려 결혼 피로연을 하고 있었던 거다. 신랑도 보이고 신부도 보이고 많은 하객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떤 사람이 노래를 하고 있는데 가수인가 보네. 잘한다~ 아프리카에서의 피로연 장면을 보게 되다니..감격스러워서 얼른 사진을 찍었는데 어두워서 그런지 사진이 흔들렸다. 아까워라>.< 

많이 시끄러웠지만 저절로 흥이 나서 그냥 식사하기로 했다. 오늘도 여전히 난 닭고기를 시켰다. 후라이드 같은 모양으로 나온 닭요리는 맛이 좋았다. 사실 배가 무지 고팠었다. 밥을 먹고 나니 너무 행복했다. 내가 이렇게 밥을 먹으며 행복해 하는 사람인 줄 여기서 처음 알았다. ㅎㅎ

 

오늘은 수확이 많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정보를 얻고, 아프리카 문화도 보고~ 여러가지로 즐거운 하루였다. 내가 밟는 모든 땅,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평안이 함께하길 소망하며 아프리카에서의 또 다른 내일을 기다린다.

    

 

<TIP 6. 우리의 소중한 필수품, 핸드폰 개통하기...

한국에서도 빼 놓을 수 없는 우리의 필수품, 핸드폰. 아프리카에서도 빼 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다. 사용료가 많이 비싸서 사용하는데 많은 제약이 있지만.. 그래서 대부분 문자로 연락을 하곤 한다. 다르에살람 사람들은 핸드폰을 사려고 열심히 돈을 번다. 심지어 한량들도 핸드폰은 거의 가지고 있다. 그만큼 핸드폰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소중한 존재이다. 핸드폰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흑백 종류로 5만실링~7만실링, 칼라는 10만실링~20만실링 정도이다. 삼성제품도 있지만 질이 좋은 만큼 가격대가 무지 비싸다(20만실링 이상). 노동자 한 달 임금이 10,000실링 정도 이니까 엄청 비싼거다. 아프리카에서 핸드폰을 사용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핸드폰 사용은 영국과 동일하단다.

1. 핸드폰 전문 판매 상가에 가서 핸드폰을 구입한다. 

2. 번호가 내장되어 있는 칩을 산다.

3. 핸드폰 베터리를 빼면 칩을 끼울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그 공간에 칩을 끼우고 배터리도 끼운다.

4. 충전식 카드(5,000실링, 10,000실링, 20,000실링 등 금액은 다양)를 사서 핸드폰에 등록(스크래치를 벗기면 번호가 보인다. 그 번호를 등록)한다.

5. 구입한 금액만큼 핸드폰을 이용한다>

 

<TIP 7. 핸드폰 저렴하게 이용하기

1. 통화료가 비싸니까 문자를 이용해 대화한다.

2. 우리나라는 발신번호서비스를 이용하려면 소정의 돈을 내야하지만 아프리카는 발신번호서비스가 무료이다. 아니, 당연히 지원되는 서비스이다. 그러므로 급하게 통화를 해야 할 때 상대방에게 전화를 하고 신호가 울리면 바로 끊는다. 그러면 상대방이 번호를 보고 전화를 하거나 문자로 연락을 해 온다(좀 치사하지만 아프리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방법을 이용한단다)>

 

 

by 멋진~posted Aug 28, 2007

 

 

 

 

 

어딘가에 있을 모기의 내용과 중복될 지도..

 

 

 

*르완다의 특징을 수 놓은 액자, 주로 여성의 일거리가 강조되어 보인다.

 

 

 

* 르완다의 일상을 새긴 목판, 주로 남자들의 삶의 모습이 보인다.

 

   풀빵 판 같은데에 콩알 같은 것을 가지고 노는 남자들의 놀이(이름을 들어도 매번 잊어버린다.).

 

   춤추기, 농사, 만나면 세번씩 얼굴 어긋 맞대고 인사하기..

 

 

 

** 볼만한 그림이 많지 않은데

 

     호텔 밀콜린의 벽을 장식하고 있는 액자가 마음에 들어서 전에 찍어 두었던 것.

 

    

 

     외부에서 손님이 오면 제일 가고 싶어하는 곳 중의 하나가 "호텔 르완다."

 

    이 호텔의 정확한 이름은  호텔 밀콜린(des mille colllines)인데..

 

    프랑스어로 천 개의 산이라던가?

 

    르완다의 별명이 천개의 언덕(Thousand hills)..

 

    아마 그런 연관으로 영화 제목이 호텔 르완다인 것 같다.

 

   사실 영화의 세트장은 남아공에 있다고 한다.

 

   아무튼 손님들이 와서 두번 실망한다.

 

   영화와는 다른 모습과 엄청나게 비싸면서 맛없는 음식..^^

 

   유명세지요.. 그래도 복도에 걸려 있는 목판 좋고,

 

   대통령 영부인의 소유라는

 

   ( 퍼스트 레이디가 아마도 이 나라 최고 부자 다섯 손가락에 드는 것 같다.)

 

    Thousand Hills 여행사 간판^^도 마음에 든다.

 

    주로 비싼 마운틴 고릴라 사파리를 하기 위한 곳이라서일까?

 

 

 

 

 

처음으로 토니 집에서 자고 일어난 아침, 바깥에서 뭔가 계속 부스럭 부스럭 하는 소리가 났다. 시계를 보니8시다. 어제 들은 바로는 지금 이 시간에 집안에 있을 사람이라곤 가정부 '에뜰' 뿐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문 앞에 섰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지금 바로 문 맞은편에서 들리고 있다. 이 문을 열면 오늘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 요 며칠 동안 새로운 사람들을 넘치고, 넘치도록 만났건만, 이는 여전히 설레고 긴장되는 일이다. 흑인 친구라고 했으니 여기 말인 줄루어(Zulu)로 인사를 해볼까? 문을 열었다. 조그마한 키에 제법 통통한, 스무 살 이쪽저쪽으로 되어 보이는 처녀가 열심히 걸레질을 하다가 나를 본다. 

 

'사우보나!(Saubona)'

 

학교 다니며 줄루어를 배우긴 배웠다만 기억나는 거라곤 '안녕' 이라는 뜻의 '사우보나' 뿐이다. 에뜰은 웃으며 아침 인사를 하고 라쉬르가 준비해 둔 아침을 내어 준다. 

 

가정부를 둔 다른 집들도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에뜰은 온갖 집안일은 다 해도 요리는 하지 않는다. 빨래와 청소를 주업으로, 가끔 토니 부부의 막내딸 쉬리아가 유치원에 가지 않는 날엔 미리 안주인이 준비해둔 샌드위치를 쉬리아에게 먹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 장면이 보고 있는 사람으로는 여간 우스운 게 아니다. 어린 아이는 매일 아침마다 먹는, 맛도 없는 샌드위치를 안 먹으려 이리 저리 도망 다니고, 에뜰은 한입이라도 더 먹이려고 그 뒤를 열심히 쫓아다닌다. 어쩌다 짜증난 에뜰이 큰 소리라도 내면, 쉬리아도 지지 않고 큰 소리로 안 먹겠다고 반항이다. 네 살짜리와 스무 살짜리의 전쟁은 항상 스무 살짜리의 승리로 끝이 난다. 쉬리아는 입을 앙 다물고, 양 볼에 잔뜩 바람을 넣어 부풀리며 까지 반항하지만 에뜰은 기어코 샌드위치를 쉬리아의 입에 넣고 만다. 에뜰은 참 부지런한 친구다. 나중에 집을 옮겨 지낼 때, 그 집에 있던 가정부와 비교하면서 그녀가 부지런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발을 놀리며 집안을 돌아다닌다. 그런 에뜰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자 열심히 비질도 걸레질도 하지만, 결국 내가 손 댄 곳은 에뜰이 다시 손질하고 다듬어야만 했다.   

 

그런 에뜰에게 남자친구가 있다. 토니가 빵 납품하러 다닐 때, 옆에서 돕는 조수, ‘시프리안’이라는 친구이다. 시프리안은 비쩍 말라 보이지만 팔뚝에 붙은 근육이며, 탄탄한 몸매가 남자다움을 물씬 풍긴다. 그렇게 멋지게 생겨서 인지 이 친구가 제법 바람둥이란다. 어찌나 바람둥이 인지, 이미 에뜰과 이 친구 사이에 애기가 둘이나 있는데도, 여기저기 다른 여자 만나는데 열을 올리더니, 급기야는 에뜰의 여동생과도 눈이 맞아 떡 하니 애까지 하나 생겨버렸다. 에뜰 입장에서는 기가 차고 환장할 노릇이다. 에뜰은 이 사실을 불과 며칠 전에 알았고, 그래서 둘 사이엔 찬바람만 쌩쌩하고 분다. 그런데 이 바람둥이 친구는 여전히 에뜰을 사랑하는 모양이다. 어쩌면 연인에 대한 소유욕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와 에뜰이 방에 같이 있을 때면 신경을 곤두세운다. 청소 도구가 내 방 침대 밑에 있는 까닭에 그녀는 끊임없이 내 방을 들랑날랑 해야만 했고, 그녀의 다림질 장소도 내 방이었다. 그녀가 방 청소를 하든, 청소 용구를 가지러 들락거리든, 다림질을 하든, 난 항상 내 할 일에 바빴다.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영어 공부를 하거나 했다. 이렇게 방안에선 서로가 각자 일에 열심인데도, 시프리안 녀석은 마당을 쓰는 척 창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고, 쓸데없이 나를 불러 내, 날씨가 좋으니 바깥에 나와 있으라는 둥 이야기한다. 사실 난 그녀가 내 방에 있었다는 사실 조차도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어느 날, 근처 동네에서 살인 사건이 있었다. 여자가 바람을 피자, 애인이 그녀와 그녀의 남자 친구를 총으로 살해하였다 한다. 사랑이라는 것이 사람을 미치게 한다고는 하지만, 이건 해도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잖아도 치안이 불안정한 남아공에 겁을 먹고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난 며칠간 꼼짝 못하고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그런데 나라고 아주 안전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리 심각하게 보이지는 않아도, 나는 두 남녀 사이에 묘하게 끼어 있었다. 언제 시프리안이 달려들어 내게 총질을 할지도 모른다 생각하자, 시프리안도 에뜰도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이젠 방에 에뜰이 들어오면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 근처 산책을 하거나, 재미도 없는 텔레비전을 보러 거실로 나갔다. 시프리안이나 에뜰이나 다 착하고, 좋은 친구들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렇지만 뉴스를 보면 하루에도 총기 사건이 빠지는 날이 없었고, 바로 윗동네에서는 연인들의 삼각관계로 인해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런 사회의 모습은 그 좋은 친구들조차도 믿지 못하게 했다. 시프리안이 비록 가난하다고는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권총 한 자루쯤은 구할 수 있다고 한다. 나중에 안 사실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원칙적으로는 총기 소유가 자유롭지 못 하다고 한다. 총기를 구입하려 할 때는 허가를 맡아야만 구입할 수 있으며, 그렇게 구입한 총기 보관도 법이 정한 법규대로 해야만 한다. 그러나 도처에는 불법 무기가 널려 있고, 만난 친구들 중에도 허가 받지 않은 총을 가지고 있다며 자랑스레 이야기하는 이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총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 중에 총들이 어디서 어떻게 공급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친구는 없었다. 그저 조직적인 갱스터들에 의해 공급된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더 황당한 이야기는 총이 대여가 된다는 것이다. 한국 돈으로 5만원 정도면 하루 대여가 가능하단다. 이 정도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시프리안이 어느 날, 나와 에뜰이 같은 방안에 있는 것이 보기 싫어, 날 죽이고 싶어진다면 밖에 나가 총 한 자루 대여하면 된다. 사정이 이래 놓으니 이래저래 시프리안과 에뜰을 보기가 갈수록 힘들어 졌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토니는 혼자 집안에 있을 때는 시프리안이라 할지라도 현관문을 절대 열어주지 말라 한다. 시프리안 뿐만 아니라 에뜰을 제외한 어느 흑인이 오더라도 문을 열어주지 말라 신신당부 했다. 대부분 가정 현관문은 항상 이중 삼중으로 잠겨 있다. 거기에 현관문 바깥쪽에 철창살 덧문이 하나 더 있어 이 덧문의 잠금 장치는 현관문보다 더 견고하다. 날이 더워 현관문을 열어 놓는다 해도, 바깥쪽 덧문은 꼭 잠가 놓는다. 바깥일을 주로 하는 시프리안은 토니나 집안사람과 이야기를 할 때, 잠긴 덧문 밖에 서서 이야기를 나눴다. 굳게 닫힌 문은 시프리안게 절대 허락되지 않았다. 아니 흑인들에게 특히 흑인 남자들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당시에는 그런 토니의 말이 내게는 곧 법이었다. 시프리안을 포함한 모든 흑인은 그저 내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시프리안과 함께 시내 구경을 나간 적이 있었다. 학교에 볼 일이 있는데, 나 혼자 보내기에는 토니가 많이 불안했나 보다. 그래서 그는 시프리안을 내게 안내원으로 붙여 주었다. 버스를 타고 시내에 나가 버스를 한번 갈아 타야한다. 둘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주로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시프리안은 주로 자기 가족들과 사는 곳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러다가 그가 갑자기 물었다.

 

“너 에뜰을 어떻게 생각해?”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했다. 보디가드가 알고 보니 의뢰인을 살해하고자 고용된 청부 살인업자였다는 어느 영화인지 책인지의 내용이 떠올랐다. 지금 주위에는 날 보호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아니 날 보호해주라고 토니가 붙여준 이가 내게 가장 위험한 사람처럼 보였다. 시프리안이 나를 이상한 골목이나 타운쉽으로 유인해 일을 저지를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저 질문에 숨이 덜컥 막힐 정도였다. 

 

“물론 좋은 친구지.”

 

“애인으로는 어때? 제법 괜찮은 여자야.”

 

“어이, 친구! 난 전혀 관심 없어. 난 한국인이 좋아.”

 

다행히 별일 없이 학교에 잘 다녀왔고, 녀석은 더 이상 이에 대해 별 이야기도 없었다. 이후로도 다른 집으로 옮기기 전까지 한 달여 간은 에뜰과 시프리안 사이에서 잔뜩 긴장한 채 보내야만 했다. 

 

가슴 아픈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현실이었다. 극도로 불안정한 치안은 이렇게 가까운 친구마저도 일단은 거리를 유지하게 만들었다. 상대가 언제 뒤통수를 칠까 하는 염려 정도가 아니라, 언제 총칼을 들이밀고 내 생명을 위협할 지도 모른다는 염려였다. 그들에게는 함부로 문도 열어주지 못 한다. 이는 흑인 인권을 위해 평생 몸바쳐온, 그래서 개인적으로 존경해 마지않는 넬슨 만델라 (Nelson Rolihlahla Mandela)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실수라고 이야기 하는 이들도 있다. 과거 아파르테이트(Aparthad) 시절에는 강력한 경찰력으로 인해 범죄에 대한 걱정이 없었다 한다. 물론 그 강력한 경찰력이 흑인들을 짓밟는데 쓰이긴 했지만 덕분에 도둑이나 강도도 별로 없었다 한다. 그래서 옛날에 지어진 주택들은 대부분 담장이 낮다. 아파르테이트 시절에 지어진 건물들은 알아보기 쉽다. 담장은 낮지만 그 위에 쇠창살이나 철조망을 억지로 높게 올린 집들은 대부분이 그 때 지어진 집들이다. 전에는 담장이 낮아도 괜찮았으나 시국이 불안정해 지니 급히 창살과 철조망을 올린 것이다. 높아진 담장과 철조망만큼 높아진 것이 또 하나 있었으니 그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믿음이 아닌가 한다. 시프리안은 내게 참 고마운 친구임에 틀림없다. 토니가 부탁하긴 했어도, 그는 나를 학교까지 데려다 주고 오고, 말 한마디를 하여도 따뜻하게 하였다. 근처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만 없었다면, 에뜰에 관한 시프리안의 이야기는 어쩌면 농담으로 흘릴만한 가벼운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와 행동 하나 하나에 잔뜩 긴장해야만 했다. 

 

어릴 때, 동네 개 한 마리가 내게 꼬리 흔들며 좋다고 따라오다가 갑자기 이빨을 들이밀고 덤벼들었던 경험이 있다. 으르렁대는 소리 하나 없이 느닷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꼬리를 흔드는 모습에 안심하고 있었기에 더 놀랐다. 그 뒤로 개가 뒤에서 따라오면 일단은 불안하다. 자꾸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며 되도록이면 쫓아내려고 한다. 시프리안의 그 웃는 모습과 친근한 모습에서 어쩌면 난 그 개의 모습을 읽어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가 그런 의도가 전혀 없이, 순수한 호의와 친절로 대한 것이라면 난 그에게 무척 미안하다. 하지만 변명하자면 남아프리카 사회에서 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겠다. 

 

날 그렇게 떨게 했던 시프리안과 에뜰. 그 둘은 결국 헤어졌고 둘 사이의 애들은 에뜰이 혼자 키우고 있다. 

 

 

 

 


 

 

 

 

사실 제가 여기 올리고 있는 이야기들은 나름 순서대로 쭉 정리가 된 이야기들입니다.

 

 

 

혹시 어디에 내 보일일이 있으면 순서대로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정리를 해 두었지요^^

 

 

 

그런데 이 곳 2africa에서 조차 딱딱하게 정리된 순서에 따라 올리려니 제가 쪼금 지겹네요.

 

 

 

그래서 내 맘대로, 저 뒤쪽에 있는 이야기를 갖다 올렸습니다.

 

 

 

앞으로도 순서 맘대로 재미있게 올려드리지요.

 

 

 

혹시, 중복된 내용이 나온다면ㅋㅋㅋ

 

 

 

쪼콩이 마구잡이로 이것저것 올리다가 실수했구나 생각하며 씹어 주시고, 욕해주세용~~^^

 

 

by 깜찌기posted Dec 13, 2006

 

 

 

 

우리는 럭셔리 호텔에서 나와 다시 시내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계속 말을 걸어오는 한량들~~ 정말 거짓말 하나도 안보태고 나의 인기가 하늘을 치솟았다. 다들 나랑 대화 한번 하고 싶어서 애를 쓰더이다~ 안쓰러운 마음에(^^;) 어떤 한량하고는 열심히 대화를 해줬다. 감격해 하는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더라~ㅋㅋ

또 한번은 지나가는데 오렌지를 파는 남정네가 우리를 불러 세우더니 오렌지를 하나씩 깍아 주면서 먹으란다. 마침 목도 마르고 가격도 비싸지 않아(한개 50실링, 100실링) 하나씩 먹고 계산을 하려는데 그냥 주는거라면서 괜찮으니 하나 더 먹으라고 하는거다. 내가 살짝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니 진짜로 그냥 주는 거란다. 맘 변할까봐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이렇게, 이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장사를 하는 남자까지도 나를 불러세우니..이들을 위해 여기서 한 1년 정도는 살아줘야 할것으로~~ㅋㅋ

 

시내를 다 구경하고 저녁을 굳이 사준다는 Africa를 만나러 내가 좋아하는 롬보호텔로 이동했다. 어제 헤어지면서 Africa가 에티오피아 음식점에 데려가기로 했기에 7시에 호텔 앞에서 만나기로 했던거였다. Africa는 차를 가지고 호텔 앞에 이미 와 있었다. 새로운 사실은  Africa가 운전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는 거다. 지난 4년을 알았지만 한국에서는 한번도 볼 수 없었던...ㅋㅋ 장롱 면허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운전을 잘 하시더라. 사람은 역시 관계를 오래 해야해~ㅎㅎ

 

식사를 하러 가기 전에 Africa는 우리에게 학교에서 만난 노르웨이 친구를 데리고 가자고 요청했다. 우리는 흔쾌히 승낙했고 노르웨이 사람인 ‘랄스’를 태우러 그의 집 앞으로 갔다. 

랄스하고 인사를 나누고 에티오피아 음식점으로 출발했다 .

에티오피아 음식은 한국사람 입맛에 딱 맞는 거 같다. 매콤하고, 달콤하고, 담백하고..등등 여러가지 소스를 이용해서 먹는 음식으로 각 소스마다 맛이 굉장히 자극적이고 맛이 좋았다. 

 

도착해서 식사를 주문하는데 랄스가 자기 친구들 2명이 더 올거라면서 양해를 구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온다는 말에 조금 당황했지만 탄자니아에서 외국인을 사귀는 것도 재미있을 거 같아 적극 환영했다(사실 이들은 모두 남자였다. ㅋㅋ). 독일, 스위스, 노르웨이, 한국 이렇게 4나라의 사람들이 만났다. 탄자니아에서 이렇게 다른 나라 사람들과 만남을 갖게 되다니.. 기대하지 않았던 수확이었다.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어서 그런지 음식도 너무 맛있었다. 분위기도 좋았고, 대화도 좋았다. 

뜻하지 않게 여러 가지로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들과의 만남이 더욱 좋았던 건 외국인들은 대부분 더치패이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식사비를 똑같이 나누어 냈다는 거다. 여러 종류의 음식을 먹고 돈은 나눠 내고 일석 이조의 효과를 보게 되었다. 이런 문화 좋네~ ㅎ

 

서로가 즐겁고 재미있는 저녁시간을 보내고 각자의 집으로 헤어졌다. 

따로 연락처를 받거나 하진 않았지만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를 뒤로하고 헤어졌다. 이들은 대기하고 있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갔고 우리는 Africa가 숙소까지 데려다 주었다.  

 

사실 이들과 대화를 많이 한 건 아니다. 여기에는 언어적인 문제가 가장 컸다. 하지만 사람이 살면서 친구를 사귀게 될 때는 언어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록 대화를 하는데 조금 불편했지만 따뜻한 눈빛과 애정, 사귀고자 하는 열정만 있으면 전 세계 그 누구를 만나도 금방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외국어를 잘한다면 대화를 하는 데 더 좋은 관계가 형성되겠지만 혹 언어를 못하더라고 친구는 얼마든지 사귈 수 있다. 언어 때문에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오픈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영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외국인을 만나도 선뜻 다가설 수가 없었던 나로서는 이들과의 만남은 신선했으며 또 다른 자극이 되었다. 이런 것이 계기가 되어 외국인에 대한 두려움이  차츰 사라질 것을 안다. 

 

나에게 새로운 문화,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언어, 새로운 만남, 새로운 세상이 탄자니아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그 끝이 어딘지, 무엇인지, 어떤 모양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껏 부푼 마음, 설레고 기대하는 마음으로 탄자니아에서의 둘째날을 마감할 수 있었다.

    

<TIP 4. 에티오피아 음식점...

다르에살람에 있는 유일한 에티오피아 음식점으로서 현지인들은 가격이 비싸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는 거의 오지 못한다. 에티오피아 사람들은‘인제라(Injera)' 라는 음식을 먹는데 인제라는 아프리카의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테프(teff)라는 곡물의 가루가 주원료이다. 인제라는 조리방식이 우리나라 부침개와 비슷하다. 하지만 부침개보다도 훨씬 얇다. 얇다고 만만히 봐서는 안된다. 뱃속에 들어가는 순가부터 부피가 점점 늘어나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부르다. 맛은 시큼하고 쫀득쫀득하다. 탄자니아에서의 인제라는 넓고 큰 접시에 각각의 스튜 형식의 소스를 올리고 인제라를 조금씩 떼어내면서 스튜를 싸서 먹는다. 하지만 에티오피아에서는 보통 인제라와 스튜를 따로 담아내고 인제라를 조금씩 뜯어 스튜에 싸 먹는다. 소말리아에서는 인제라를 라호흐(lahoh)라고 한다. 

한국인 뿐 만아니라 외국인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외국인들도 먹기에 좀 비싼 편이라 3명 이상이 와야만 푸짐하게, 그리고 좀 더 저렴하게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2명이 오면 많이 비싼가격에, 종류도 한정되어 있어 좀 불리하다. 그래서 나중에 이 음식점을 가고자 한다면 3명 이상 무리지어, 특히 더치패이가 일상인 외국인들과 갈 것을 적극 추천한다> 

 

<TIP 5. 인제라 만들기...

테프 밀가루에 물을 조금씩 넣으면서 덩어리 지지않게 섞는다. 잘 섞인 반죽은 헝겊을 덮어 실온에서 반죽에 거품이 생기고 시큼해 질 때까지 3일 정도 둔 다음 소금을 넣는다. 반죽은 팬케잌 만들 때 정도의 농도가 적당하다. 솥뚜겅처럼 생긴 조리 도구에 반죽을 부어 앏게 펴가면서 중간정도의 화력으로 만드는데 국자로 떠서 팬에 두르고 표면에 구멍이 나타나고 마르면 꺼내어 식힌다. 쉽게 말해 부침개처럼 만든다고 생각하면 된다. 프랑스 빵인 크레페수제트보다는 두껍고 팬케이크보다는 조금 얇게 만든다고 한다>

 

드디어 토니의 큰 아들 리납이 퇴원했다. 무릎 수술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다행히 수술이 잘되어 아무 문제없다 한다. 기분이 좋아진 토니는 저녁 때 가족들을 전부 데리고 외식을 나갔다. 같이 가자는 말에 가족들끼리 맛있게 먹고 오라 대답했건만, 토니는 한사코 차에 태워 끌고 나갔다. 그렇게 뜻하지 않게 가족 식사에 동참했다. 식당에 도착해, 자리에 앉자 웨이터가 주문을 받아 갔다. 메뉴판을 보고 우물쭈물 하고 있던 나를 위해 라쉬르가 달걀 요리로 주문을 대신 해 주었다. 이제 좀 익숙해 질 법도 한데, 암만 봐도 뭐가 뭔지 모르는 메뉴판은 아직도 골칫거리다. 그래서 지금도 식당에 갈 때면 같이 간 친구에게 주문을 대신해 달라고 부탁하거나, 매번 똑같은 음식만 주문한다.

 

리납이 지겨웠던 병원 생활에 대해 한창 불평하고 있을 즈음, 웨이터가 작은 유리 대접에 레몬을 띄운 깨끗한 물을 가지고 와 각자의 앞에 놓아준다. 마침 목이 마르던 차라 얼른 대접을 들어 마셨다. 물맛은 별로였다. 날은 더운데 물은 미지근했고, 거기에 레몬까지 띄워놓아, 싱거운 레몬 향과 맛이 오히려 물맛을 버리는 듯싶었다. 

 

‘시원한 물은 그만두고라도, 레몬을 띄우긴 왜 띄워? 물맛 버리게.’

 

겨우 반도 못 마시고 물 대접을 식탁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다. 날 보는 토니의 눈이 왠지 겨우겨우 웃음을 참고 있는 듯했다. 둘째 아들 리반은 아주 배를 잡고 뒹굴며 웃는다. 웨이터도 당황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토니가 얼른 웨이터에게 얼음물 한잔 가져다 달라고 부탁한다. 순간 머릿속이 환해졌다. 핑거볼(finger bowl)이라는 손 씻으라 내준 물이다. 손 씻으라고 내 준 물을 마셨다. 이렇게 창피할 수가. 예전 고등학교 영어 시간에 핑거볼을 들이킨 한국사람 이야기를 들으며 배꼽 쥐며 깔깔댔던 생각이 났다. 어떻게 마실 물인지 손 씻을 물인지 하나 구별 못 하냐 비웃으며 말이다. 그런데 그도 그럴 것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핑거볼은 손 씻는 물이라 생각하기 힘들게 생겼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유리 대접에 레몬까지 떠 있어, 이건 보기에도 시원하고 참 맛나게 생긴 물이다. 평소 식당에 들어가 물을 잘 마시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그 성의가 고마워서 한잔 들이키지 않고는 못 견디게 생겨 먹었으니, 어찌 아니 마시지 않고 배겨날 수 있었을까? 차라리 나중에 나온 얼음물이 훨씬 볼품없고, 먹음직스럽게 생기지 않았으니 말이다. 괜히 유리 대접과 레몬을 탓 하며, ‘한국 식당에서는 식사가 나오기 전에 항상 마실 물을 가져다 준다, 난 그래서 착각을 했다.’변명을 해 댔지만 이미 친구들의 웃음을 멈출 수는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토니가 덕분에 아주 즐겁게 식사 했다며 고맙단다.

 

 

 


 

 

 

 

<쪼콩>

 

오늘은 영 기분 거시기 하신 분들 웃으라고 적어 봤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도 경험해보신 분들 계실지도ㅋㅋㅋ

 

 

by 멋진~posted Aug 15, 2007

 

 

 

지난 토요일에 에이즈 가정을 심방할 때 몇 번을 갔던 곳임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이 집을 발견했다.

 

 

 

전통 아프리칸 가옥이라고...패스터가 어쩐지 미안한 듯, 부끄러운 듯…

 

우리로 치면 초가집인 셈.

 

피그미 빌리지나 박물관에 있는 줄 알았더니 바로 키갈리 시내에도 있었네.

 

 

 

나 자랄 때만 해도 우리 동네에도 초가집이 몇 채 있었다.

 

그러니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날아다니는 기분이 들지?

 

 

 

1980년에 청담동의 한 건설현장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점심을 먹으러 지금의 도산공원 근방까지 가면

 

 그곳 으리으리한 저택들 사이에 판자 집이 두 채인가 남아있었다.

 

나도 가난하게 자라서 나름 공부에 대한 한,

 

부에 대해 거친 마음으로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있었던 때라서

 

그 판자 집에 누군가 청소년이 자라고 있다면

 

사회에 대한 저항을 갖고 자라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었다.

 

엊그제 이 집을 보며 다시 동일한 기도가 나온다.

 

바로 언덕 건너편에 청담동 저리 가라하는 커다란 저택들이 들어서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은 외국인이 살 수 있는 집 값이 엄청나게 비싸서

 

                                  보통 600불 선에서부터 어떤 집은 한 달 1,500불짜리도 있다.

 

             아니다. 까치루 저 위의 한 아파트. 아마 르완다 최고가의 아파트인 것 같다.

 

                                                                               그 집은 한 달에 2,800불이다.

 

                                                              미국에서 온 자매가 뉴욕보다 비싸다고…

 

                                                                                                             당연한…

 

대부분이 흙 벽돌 집인데 지금 정부에서 재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얇게나마 시멘트 벽돌을 사용하게 하는데

 

안전을 생각할 때 시멘트를 조금이나마 사용한 집이라야 외국인들이 살 수 있다.

 

흙 벽돌 집은 나무 기둥으로 한 번 툭 쳐도 구멍이 뻥 뚫린단다.

 

외국인 거주자, 선교사는 뭔가 가진 게 있다고 생각되어

 

도둑 침입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곳이라서…

 

 

 

암튼, 그 집에 누군가 살고 있는가? 물었더니 그렇단다.

 

 차마 아이들이 자라느냐고는 묻지 못했다.

 

무감바지 피그미 빌리지의 아즈만이 생각나기도 하고…

 

이상하게도 이곳에 와서 아이들이 힘겹게 자라는 것을 보면

 

꼭 도와줘야 한다는 강박이 너무 심해져서

 

벌써부터 나를 보호하려는 방어기제가 작동하는가보다.

 

 

 

이 날도 나프탈이라는 아이를 만났는데,

 

지난 5월에 엄마를 잃은 아이, 교회의 한 성도가 보호하고 있다는데

 

그녀조차도 하루하루 먹을 것을 염려해야 하는 어려운 형편에

 

눈도 불편한 모습을 보자니...

 

아이는 그 몇 달 전의 좋은 혈색을 그새 잃고

 

오히려 더 작아진 것 같아 마음이 언짢았다.

 

동네 사람 모두에게 사랑을 받고는 있는 모양인데

 

아이들이 그것만으로 자라지지는 않으니,

 

우유를 대 주겠다고 약속하고,

 

돈을 쥐어주고 나왔지만 그것이 아이를 위해 모두 사용될지도 의문이고…

 

아, 어려운 사람들이 대부분인 이곳에서

 

어려운 사람 만나는 것이 자꾸 마음 힘들어지니…

 

 

 

이 집 앞의 망고나무 꽃이 한참 피어 냄새가 지독하다.

 

망고 잎이 밤 잎 비슷하던데 냄새 지독한 것도 밤 꽃 같다.

 

저 망고나무 가득한 꽃이 다 망고가 되기를…

 

그래서 이 집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 수확이 기쁨 가득하길…

 

 

 

그리고 누군가 그곳에서 자라나고 있는 아이의 앞날이

 

망고 꽃처럼 활짝 피기를…

 

by 깜찌기posted Dec 13, 2006

 

 

너무 더워서 계속 잘 수가 없었다. 깨서 시계를 보니 새벽 6시(한국 시간보다 6시간 느리다)였다. 한국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시간에..너무 더워서..ㅋ

어제 ‘다르에살람은 저녁 7시부터 다음날 아침 7시까지만 전기가 들어온다’라는 Africa 말이 생각나서 얼른 에어컨을 켰다. 한시간이라도 시원함을 느끼기 위한  처절한 노력이었다. ㅎㅎ

시작부터 럭셔리한 호텔에 머물게 되면서 의도하진 않았지만 호화롭게 여행을 시작했다. 난 아마도 이 호텔(에어컨 너무 좋더라)을 무지 사랑하게 될 거 같다.ㅋㅋ

 

 

(TIP 1. 호텔정보)

 

 

일찍 일어난 김에 아침부터 먹어야 겠다는 생각에 1층에 있는 식당으로 내려갔다. 아침으로 준비된 것은 파파야, 콘푸레이크, 빵, 우유, 패션주스(과일 이름이 ‘PASSION'이다)이다. 전기가 나간 관계로 빵을 구워주지는 못한단다. 으~ 언젠가는 먹고 말거야~~ 

정말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본격적인 시내 투어를 시작하고자 만반의 준비를 했다. 

샤워하고 예쁘게 화장(기미를 방지하고 자외선을 차단하고자 매일 아침마다 화장을 함)한 다음 호텔 앞에서 달라달라(교통수단)를 타고 시내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가본 곳이 한 호텔이었다. 우리가 머문 호텔보다도 훨씬 더 럭셔리한 곳에 잠깐 들어가 봤다. 이름이 Movenpick Royal Palm Hotel 이었다. 로비부터해서 정말 좋더라. 우리나라 호텔 못지않게 좋았다. 여기 하루 숙박비는 150$정도 될라나? 부끄러워서 물어보진 않았다. 한국 사람들이 몇몇 지나간 것 같은데.. 이 호텔에 머무나보다. 이렇게 좋은 호텔에 머물고 있는 한국 사람들은 주로 무슨 일을 하는 지 궁금했지만 그들을 붙잡고 굳이 묻진 않았다.   

 

호텔 구경을 다 끝내고 환전하러 환전소로 이동했다. 재미있는 것은 환전소마다 환전해주는 금액이 달랐다. 입구에 게시판을 세워두고 손님들에게 홍보하고 있었다. 제일 높게 써있는 곳에 들어갔다. 1$에 1340실링이고 며칠 뒤에는 1400실링정도로 오른다는 얘기에 500$ 정도만 환전했다. 나중에 더 환전해야지..(근데 다시 환전했을 때는 정부에서 환율 조정을 하는 바람에 1200실링대로 떨어졌고 많이 손해봤다. 으~)

환전하는 곳에서 얼마 떨어진 곳에 에미레이트 항공사가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한국 입국 일정을 연기하고자)에 가 봤는데 점심시간인지 문이 닫혀 있었다. 이따 다시 와야 겠다.

 

시내를 몇 곳 돌아다녔다. 다니다가 배가 고프길래 시계를 봤더니 12시가 조금 넘어있었다. 

역시 배는 정확해~ㅎㅎ

파트너는 잠깐 만날 사람이 있다면서 2시 이후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나는 시내 중심에 인터넷 카페도 있고 여러 종류의 식사를 선택해서 할 수 있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인터넷 카페에는 사람이 무지 많아서 차마 이용할 수는 없었다. 가게는 햄버거, 중국요리, 인도요리 등 다양한 음식들이 있었다. 난 고심 끝에 햄버거를 먹기로 했다. 햄버거를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아프리카에서 먹는 햄버거의 맛이 궁금했다. 생각보다 맛있었다. 한국처럼 내용물이 많이 들어 있지는 않았지만 맛이 깔끔했다. 맘에 드는 것은 감자가 엄청 크고 양이 많다는 거다. 

식사를 다 하고 한국에서 가져간 책을 읽었다. 중간 중간에 사람 구경도 했다. 다양한 옷차림에, 다양한 얼굴을 하고, 다양한 말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들은 그냥 ‘사람’이었다. 유럽인, 한국사람, 인도사람, 중국사람..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다르에살람에 있는지 처음 알았다. 이들이 어떤 목적으로 지금 여기에 있는진 잘 모르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냥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서로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이 더 중요한 거 같다.

 

시간이 한참 지난 거 같은데 파트너는 오지 않았다. 시계를 봤더니 2시 30분이 넘어 있었다. 더 이상 책보는 거, 사람 구경하는 것도 재미없어서 그 자리를 떠났다. 이리 저리 돌아나녔다. 길거리에서 파는 여러 상품들도 구경했다. 

내가 이쁘다고 어찌나 말을 걸어 오던지.. ㅋㅋ 내가 웃으면서 살짝 인사를 해줬더니 더 좋아한다. 오메~난리나심~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다 보니 처음에 도착했던 호텔이 눈에 띄었다. 날씨도 너무 덥고 해서  호텔 로비에서 책을 읽기로 마음먹고 호텔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각자의 일들을 하느라 내가 오래 있어도 신경쓸 거 같지 않았다. 오예~

한참을 책에 열중하고 있는데 호텔 입구 저 멀리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내 파트너였다. 얼굴은 잔뜩 굳었고, 더워서 그런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순간 무서웠다. 위기를 모면하고자 ‘왜 이리 늦으셨어요?’라며 방긋 웃어주었다. 이런 나의 노력에도 나의 파트너는 결국 화를 내더라. ‘내가 너를 찾으러 얼마나 돌아다닌 줄 아냐, 우리가 만나기로 한 장소에 그냥 있지 왜 이동했냐..’, ‘우리가 못 만났으면 어찌할뻔 했냐’ 등등...  어찌나 말을 끊이지 않게 하던지.. 신기했다.ㅋㅋ 

‘잘못했다’, ‘정말 미안하다’라는 말로 싹싹 빌었다. 마음이 넓으신 분(?)이라 다행히 그걸로 마무리 되었다. 

 

에미레이트 항공사에 다시 방문했다. 전기가 나가 번호표를 끊고 기다리지 못했다. 번호표가 없어도 온 순서대로 일을 처리해줬다. 

항공사를 방문한 이유는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짜가 10월 5일이었는데 하루라도 더 머물고 싶어 7일로 연기하려고 방문한 것이다. 직원의 말은 표가 없어서 안된단다. 5일 날짜를 취소하고 대기 상태로 있을거냐고 묻길래 그냥 놔두라고 했다. 바꿨으면 좋았을 걸..내심 기대했는데..무지 무지 아쉬웠다.

 

 

<TIP 1. 롬보호텔은....

4층의 건물이다. 시내에서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사실 동네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싱글룸, 더블룸, 스위트룸으로 나뉘는데 싱글룸은 더블룸과 내부 구조는 거의 같다. 단 방 안에 화장실이 없다는 거~ 그리고 아침 식사는 한명분만 나온다는 거~ 방마다 TV, 냉장고, 에어컨이 기본 옵션으로 되어 있다. 가격은 싱글룸은 18,000실링, 더블룸은 25,000실링, 스위트룸은 30,000실링이다. 더블룸의 경우 침대가 하나 있는 방도 있고 2개 있는 방도 있는데 그건 선택하면 된다. 스위트룸은 너무 비싸서 들어가보지도 못했고 처음에는 더블룸에서 며칠 머물다가 나중에는 돈이 없는 관계로 싱글룸에서만 지냈다>

 

<TIP 2. 아프리카에서의 화장...

아프리카는 햇빛이 너무 강렬해서 썬크림을 바르는 건 필수다. 그리고 가능하면 썬크림만 바르지 말고 한국에서 화장을 하는 것처럼 메이크업 베이스, 트윈케익까지 바를 것을 권장한다. 화장을 하는 것이 강렬한 태양을 그냥 받는 것보다 훨씬 낫다. 아침마다 화장을 열심히 한 게 도움이 되었는지 나중에는 한국에서 가지고 있던 피부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냥 혼자만의 생각에..ㅋ)>

 

<TIP 3. 달라 달라 너를 보여줘...

 

우리나라 봉고차보다는 크기가 조금 크다. 버스처럼 요금을 내고 몇 명을고 태워서 이동한다. 달라 달라 앞 범퍼에 보면 가는 목적지가 친절하게 써 있으니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맞는 차를 타면 된다. 요금은 200-300실링인데 보통 200실링이고 거리에 따라 300실링을 내기도 한다. 현지인들은 짧은 거리면 눈치껏 150실링을 내기도 하더라>

 

 

by 멋진~posted Aug 09, 2007

 

 

 

http://blog.naver.com/b0810rw/90020890884

 

아프리카에 살면서 갑자기 기운 쭉 빠지고 마음 허탈해 질 때는 

뭔가 이해되지 않는 사태에 대해 설명을 원할 때 흔히 하는 말

 

“TIA”라는 말을 들을 때다.

 

아, 그 말 진짜 속상해..

 

 

 

그러면서 나도 어쩌면 그들이 알아듣는다면 속상해 할 생각 갖고 있지.ㅠㅠ.

 

뭔가 기계적인 것들, 아니면 발전적인 뭔가를 기대하다가 낙심 될 때..

 

“아프리카서 뭘 바래?!”

 

 

 

그뿐인가?

 

이번에 그랬다.

 

아프간 사태로 아프리카 선교지에도 간접적인 피해랄까 그런 일들이 생기는데

 

아프리카라서 그냥 무시되는 것 같은 느낌에 서글펐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프리칸이라고 무시하는 발언 싫다.

 

아프리카에 살고 있다고 나까지 무시당하는 것 싫다.

 

제일 나쁜 건 내가 아프리카에 있다는 사실 때문에

 

미리, 스스로, 많은 것을 지레 포기하고 내가 나를 무시하듯 단념하는 것 정말 싫다.

 

부족과 민족

 

 

글머리에 앞서, 이 글은 욕먹을 각오를 하고 쓴 글이라는 점을 밝혀 둔다. 인류학에 있어서 ‘낫 놓고 이게 기역인가?’ 하는 주제에 이제부터 사회 진화네 뭐네 하는 소리들을 지껄일 것이다. 다른 학자들의 글을 충분히 읽고, 더 충분히 공부하고 이 글을 쓴다면 더 좋겠지만, 급한 성질 탓에 제대로 공부도 안하고 일단은 지껄이고 본다. 

 

‘아’다르고 ‘어’다르다. 당연하다. 그런 맥락에서 부족과 민족은 같은 듯 참 다르다. 

 

 

 

부족(部族): [명사] 같은 조상·언어·종교 등을 가진, 원시 사회나 미개 사회의 구성단위가 되는 지역적 생활 공동체.

 

 민족(民族): [명사]일정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동안 공동생활을 하면서 언어와 문화상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 집단.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아프리카에 있어서 부족이라는 단어는 차라리 생기지 말았어야 할 단어이다. 아프리카 부족과 아프리카 민족, 이 두 단어 중 나조차도 아프리카 민족보다는 아프리카 부족이 듣기 더 친숙하다. 아프리카 민족이라는 단어 보다는 아프리카 부족이라는 단어를 사는 동안 훨씬 더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리라. 인류학의 선구자라는 멍청이들이 아프리카에 갖다 붙인 단어 ‘부족’으로 인해, 우리는 아직까지 아프리카를 미개한 대륙으로 먼저 판단하고 사고를 진행한다. 부족이라는 단어는 그 느낌만으로도, 그들은 벌거벗거나 아랫도리만 겨우 가린 채, 창 들고 활 들고 들판을 뛰어다니며 짐승들을 쫓아다닌다. 코끼리에게 독화살 한 대 박아놓고 코끼리가 쓰러질 때까지 무식하게 쫓아다닌다. 이는 단순히 우리와 다르다는 의미만을 내포하고 있지 않는다. 이는 웃기는 것이다. 

 

위에 사전에서 인용한 ‘부족’이란 단어에는 분명히 ‘미개 사회의 구성단위’라고 나와 있다. 그래서 아프리카 부족은 미개하게 된 것이다. 그들이 미개하기에 부족이라 부른 것이 아니라 그들을 부족이라 부르기에 그들이 미개한 것이다. 사실은 미개하지 않다. 그렇지만 미개하다. 사회 진화론에서 떠들어 대던 사회의 진화는 유럽의 선진 문명이라는 이름 좋은 껍데기를 핑계로 유럽 외 사회를 미개하고 미천한 부족으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유럽 부족’이라는 말은 어떤가? 게르만 부족, 앵글로 색슨 부족이라는 말은 어떠한가? 불행하게도 그들에게는 부족보다는 민족이 훨씬 어울린다. 그래서 그들은 미개하지 않은가 보다. 웃기는 것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 집단’이라는 표현이다. 

 

 

 

 역사 [歷史]: [명사]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또는 그 기록. 

 

 

 

유럽 부족은 과거 화려한 그리스, 로마 문화를 토대로 문화, 종교, 경제 등 모든 분야에서 -절대 많은 분야에서가 아니다. 모든 분야에서이다- 세계를 이끌어 왔다. 그들은 역사를 토대로 형성된 집단이다. 역사를 통해 정당하고 검증된 사회 변화를 겪어 왔다. 그래서 그들의 모습은 인류의 정도(正道)이며, 그렇기에 인류 사회는 유럽 사회의 모습을 닮아가야 한다. 

 

반면 부족에는 역사가 없다. 그저 같은 조상, 같은 언어, 종교 등을 가진 원시 사회나 미개 사회의 구성단위가 되는 지역적 공동체일 뿐이다. 민족이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 집단이라는데 비하면 이는 엄청난 차이이다. 말대로라면 부족에는 역사가 없다. 역사가 없기에 그들에게는 학교 역사 시간에 배웠던 정치, 문화, 경제 등 인간 집단과 관련된 어떠한 것도 허용이 되지 않는다. 한발 더 나가보면 부족이라는 단어는 그들에게 역사를 빼앗아, 그들의 시간마저도 앗아가 버린다. 시간이 없기에 그들에게는 변화도 없다. 그래서 그들은 아직까지 옷을 입을 줄도 모르며, 창과 활로 짐승 사냥에 정신이 없다. 역사는 곧 시간이며, 역사가 없다는 아프리카에 대한 인식은 그들의 시간을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인간은 이제 우주를 들락날락 하는데도, 유독 아프리카인들 만은 아직도 너른 산과 들을 알몸으로 뛰어다닌다. 

 

왜 우리는 그들에게서 역사와 시간을 빼앗아 버렸는가? 이는 앞서 말한 잘난 인류학자들 덕택이다. 그들은 자기와 다른 모습을 우습게 치부해버렸다. 물론 모든 책임을 그들에게 떠넘길 수는 없다. 어쩌면 그들은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아프리카에 접근해야 한다는 생각에 최대한 그들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 애 썼을 것이다. 물론 우습게 표현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말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이미 ‘인류는 진화한다’라는 생각에 젖어있었고, 그 진화의 정점 유럽을 향해 아프리카는 달려가고 있다 판단했다. 말 많은 생명 진화론 계보를 보면 인간은 단세포 생물에서 시작해 진화의 꼭대기에 서있다. 인간으로 진화하지 못한 다른 생명들은 그들 나름대로 훌륭한 삶의 방식을 찾아냈고, 그에 맞게 진화해 왔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 지구상에 살아남은 생명들은 모두 진화의 정점이다. 그런데도 인간은 인간만이 그 정점이라 착각한다. 그래서 동식물을 연구하는 학자들 중 상당수는 조사 대상을 인간과 비교하여 설명한다. 사회 연구도 이와 비슷하다. 생명 진화와 비교하자면 유럽은 인간이고, 다른 민족은 아직 인간이 되지 못한 생물이다. 그래서 그들 인간 집단을 표현하는 단어도 민족이 아닌 부족이다. 이미 인간의 눈에는 사자나 호랑이와 같은 맹수조차도 그저 우스운 존재이다. 유럽에게 아프리카는 그저 맹수였다. 과거 유럽이 아프리카를 침범할 당시, 총과 대포 앞에 창과 칼로 할퀴며 달라 드는 그저 성난 맹수일 뿐이었다. 유럽인들이 아프리카인들을 보며 유인원에서 인간으로 진화하는 그 중간 단계라고 까지 생각했다는 사실은 더 이상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래서 살아 있는 사람을 잡아다가 박물관에다 전시를 해 놓기도 했다. 유럽인들에게 아프리카인은 인간이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과거 흑인 노예들은 유럽인들에게 당연한 것이었다.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이도 없었을 것이었다. 소에게 밭일 시키며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인간이 아니었기에 그들에게는 역사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들에게 역사가 있다는 사실은 조금도 용납되지 않았다. 에티오피아의 찬란하고 위대한 역사도, 서사하라를 지배하던 송가이(Songhai)도, 짐바브웨에 세워진 돌 성도 유럽인들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사실이었다. 짐바브웨의 돌 성, ‘그릿 짐바브웨 (Great Zimbabwe)’ 를 솔로몬 왕이 보물을 숨겨놓은 성이라고 한 일은 웃기려 작정을 해도 아주 단단히 작정한, 웃기지도 않는 사건이었다. 유럽의 인류학자들은 이런 아프리카인들의 집합을 부족이라고 불렀다. 민족이라 부르기에는 뭔가 덜 떨어진 단체였다. 생물 진화 학자들이 다른 생물을 인간에 비교하여 설명하듯, 유럽 인류학자들은 다른 민족을 유럽에 비교하여 설명하였다. 그들도 알지 못하게 자리한 유럽 우월주의를 머릿속에 담은 채 말이다. 그 우월주의는 인류학자들이 유럽과 아프리카를 비교하는 과정에서, 어쩌면 자기네도 모르게 아프리카를 열등한 모습으로 그렸다. 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각자 나름 진화의 최상위에 있는 것처럼, 아프리카 역시 사회 진화의 정점에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랐거나, 잊었다. 그나마 사회 진화 라는 게 있다면 가능한 이야기지만 말이다. 

 

독자들이 글을 읽으며 이 상황은 이제 더 심해진다. 아마 그들은 어디서 ‘아프리카인들은 옷도 안 입고 벌거벗은 채 다니며, 무슨 짐승 소리인지 인간 소리인지 구분이 안 되는 소리로 띠까띠까 거리며 다니더라.’ 라는 소리를 이미 한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 나름대로 덜 인간된 인간들의 모습을 상상하였으리라. 이제 독자들이 상상했던 그들의 모습은 ‘지식의 보고요, 세상의 거울’ 이라는 책이 아주 생생하게 묘사해준다. 독자들은 상상했던 그들의 모습을 책을 통해 다시 확신한다. 하지만 이 때 독자들은 그들을 ‘우리와 다르게 사는 사람들’ 이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덜 떨어진 사람들’ 이라 판단했다. 독자들은 인류학자들과는 달랐다. 인류학자들은 알량한 체면 때문에라도 아프리카인들을 대놓고 웃지는 못했지만, 독자들은 맘껏 비웃어도 된다. 자기들과 다른 삶의 방식은 우습고,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여겨도 독자들에게는 아무 책임이 없다. 따스한 햇살아래, 고풍스런 양산에, 꽃과 깃털이 달린 모자를 살짝 삐딱이 쓴, 그리고 촌스럽게 펑퍼짐하니 퍼진 치마를 입은 어느 숙녀 분께서는 벗고 거리를 다닌다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리에 얼굴을 붉혔을 것이다. 그리고 어디 가서 손으로 입을 가리며 교양 있게 ‘호호’ 웃으며, 저 쪽 아프리카 사람들은 무식해서 옷도 안 입고 산다며 수다를 떨었겠지. 웃을 때 눈가에 지는 그 주름에는 무식한 것들에 대한 업신여김과 인간 같지도 않은 사람들에 대한 경멸을 가득 담았을 것이다. 인간 같게 살지 못 하는 그 들을 어여삐 여긴 어떤 이들은 이제 그들을 ‘구원’ 하러 아프리카로 향한다. 선교사들은 벌거벗은 것은 야만적이라며 그들에게 옷을 가져다 준다. 그들이 벌거벗은 것은 ‘그들에게 옷이 없기 때문’ 이라고 착각하면서 말이다. 서아프리카 어떤 마을에서는 선교사들이 나눠 준 옷으로 병을 얻어 마을 주민이 무더기로 죽어 나갔다. 그 곳에는 옷에 붙어, 병을 옮기는 작은 해충들이 득실거렸고 이를 모르던 선교사가 주민들에게 강제로 옷을 입혔다가 벌어진 비극이었다. 

 

과거 유럽에서 벌어진 일들이었다. 지금도 유럽이 저러는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아직도 저러고 있다. 과거 유럽 유럽이 아프리카를 깔보며 우습게 보던 모습들은 현재 우리 일상에 그대로 남아 있다. 아프리카에 관한 TV 다큐멘터리를 보면, 일단 거기는 동물의 왕국이다. 인간들은 없다. 오로지 동물들만이 서로 먹고 먹히며, 생존에 여념이 없다. 그나마 몇 개 없는 인간들에 대한 다큐멘터리에서는 괴성을 질러대며 껑충껑충 뛰며 춤 같지도 않은 춤을 춤이라 우기는 사람들과 사자 사냥, 그리고 염소 피를 서로 나눠 마시는 모습이 나온다. 물론 그들 대부분은 벗고 있거나 천 몇 쪼가리로 겨우 몸을 가리고 있다. 아프리카가 왜 발전되지 못 했냐는 질문에 어떤 똑똑하신 분들은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아프리카는 원래 기후가 먹고 살기에 좋아서, 그들이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모든 것이 자급자족을 통해 해결됐다. 그래서 아프리카 사람들은 게을러지게 되었고, 그 생활 습관이 아직까지도 남아서, 아프리카는 현재도 옛날 모습 그대로이다. 그래서 발전이 안 됐다.”

 

그에게 아프리카가 유럽에게 당한 착취를 암만 이야기 해 준다 해도, 그가 생각을 바꾸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에게 발전하지 못한 아프리카는 순전히 아프리카의 기후와 선천적으로 게으른 그네들 탓일 뿐이다.

 

언젠가 한국의 한 대학교에서 아프리카 음악을 연구하는 학생들이 어느 행사에 참여하여, 아프리카 음악을 선보일 일이 있었다. 행사는 세계 각국의 음악, 춤 등을 소개 하는 행사로 세계의 음악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었다. 주최 측은 무대에 올릴 팀을 선별하기 위해 오디션을 열었고, 아프리카 음악 팀은 오디션부터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에, 케냐에서 직접 공수한 케냐 전통 의상을 입었다. 이날 아프리카 음악 팀에게 한 오디션 담당자의 말은 우리가 아프리카를 얼마나 잘못 알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다 좋은데, 의상이 좀 걸립니다. ‘아프리카면 아프리카답게’짐승 가죽 무늬 뭐 그런 거 입어야 하지 않나요?”

 

오디션 담당자에게 아프리카다운 아프리카는 짐승 가죽을 입은 아프리카였다. 그 곳에서 직접 가져온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무늬들은 그의 상식에 어긋나는 아프리카였다. 그래서 진짜 아프리카 전통 옷을 보며, 아프리카답지 못한 의상이라 한다. 결국 그 팀은 불행히도 표범 무늬가 그려진 천을 동대문에서 구해 옷을 만들어 입었다. 진짜 아프리카 전통 의상을 두고도, 사람들에 맞는 아프리카를 만들어내기 위해, 표범 무늬 천을 동대문에서 구한 재미있는 이야기다. 어쩌면 그 팀이 사람들 머릿속에 있는 아프리카를 연출하기 위해 그들의 입맛에 맞는 아프리카를 연출했듯이, 다큐멘터리 관계자들 역시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아프리카를 보여주기 위해 그렇게 짐승들을 찍어대는 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아프리카 민족이어야 한다. 그들에게도 분명히 역사가 있다. 자랑스러운 역사도 있고, 부끄러운 역사도 있다. 아프리카 땅이 유럽의 지배하에 있던 시절,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독립을 위해 싸웠다고 하면 믿겠는가? 우리가 과거 일본에 저항했던 것처럼, 그들도 똑같이 싸웠다. 오히려 일본 침략 시, 우리가 그대로 나라를 갖다 바친 꼴로 빼앗긴데 반해, 적어도 그들은 창, 칼을 들고 유럽의 침입에 맞서 싸우기라도 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도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항해 싸우다 죽은 우리 청년들처럼, 아파르테이트 정권에 대항하다 죽어간 수많은 청년들이 있었다. 우리가 민주 투사라며 그 죽어간 청년들에 대해 안타까워하듯이 그들 역시 민주화를 위해 피 흘려 죽어간 청년들에 똑같이 안타까워한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사회를 가지고 있고,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사람이다. 전혀 우습지도, 덜 떨어지지도 않았다. 언제까지 아프리카에는 동물들만 득실거리고, 거기 사람들이 미개하다고 생각할 것인가? 사회 진화는 없다. ‘변화’ 라는 단어를 쓴다면, 그리고 그 변화를 ‘역사’로 표현한다면 나는 고개를 끄덕 끄덕할 것이다. 아직도 사회는 진화하고 발전 한다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 질문에 대한 그들의 대답이 궁금하다.

 

‘발전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과연 인류는 발전했는가? 무엇을 보고 발전했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고고학계에서 이야기하고, 중 고교 역사시간에 배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원인이 최초의 인류라면, 우리는 분명히 이 사실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아프리카의 시간은 세계 어느 대륙보다도 길다는 사실을 말이다. 

 

사냥감에 독침 하나 꽂아 두고, 쓰러질 때까지 쫓아다니는 모습이 과연 우스운가? 그들은 그런 사냥 방법 덕에 무식하게 사냥감과 피를 흘리며 싸울 필요가 없다. 게다가 그들은 아마 그 한 번의 사냥으로 적어도 몇 날 며칠은 포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습게 보이는 그들의 행동에 그들 나름의 소중한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네는 남들이 개고기 먹는다며 한마디 하면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라 들면서, 왜 남의 문화에는 저질이네, 야만적이네 하며 시비란 말인가? 혹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발전이라는 개념은 서구 사회처럼 되는 것은 아닐까? 서구 사회와 같은 모습에 가까울수록 그 사회는 발전하였다 평가 받고, 그렇지 않으면 덜 발전하였다 평가 받는 것은 아닐까? 진화란 없다. 역사가 있다. 진화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변화라면 역사란 다양성을 인정하는 개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프리카에는 부족이 없다. 거기에도 똑같이 민족이 있다.

 

어린 학생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종종 있다. 지구의 꼭대기가 어디냐 물으면 ‘북극이요.’참 귀엽게도 대답한다. 난 그들에게 지도를 한 번만 뒤집어 보라고 이야기 한다. 어린 친구들에게 지도를 뒤집어 놓고 다시 물으면 이제는 대답이 둘 중 하나로 바뀐다. 북극과 남극. 지도를 옆으로 돌려놓으면 북극과 돌려놓은 지도에서 위에 있는 부분이라 대답한다. 희한하게 아무리 지도를 이쪽으로, 저쪽으로 돌려놓아도 ‘북극’이라는 대답은 꼭 나온다. 어디서 듣기에 지도 상 북반구가 남반구 위쪽을 차지하게 된 것은 유럽 열강들이 북반구에 있기 때문이라 한다. 사실 남극을 위에 그려 넣은 지도는 여태 한 번도 보지 못 했다. 유럽이 참 대단하긴 대단하다. 이 어린 친구들 머릿속에 까지 자기네가 위에 있다고 집어넣은 걸 보면 말이다. 지구본을 틀에서 떼어내 몇 바퀴 휘휘 돌린 후 어린 친구들에게 보여줘도 지구의 꼭대기는 북극이라고 대답하는 친구들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생각을 조금만 달리하면, 지구라는 별은 위가 없는데 말이다.

 

난 지금 그 친구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이 자기네가 생각하는 위는 ‘북쪽’이 아니라 ‘유럽이 있는 북쪽’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나이가 되길 기다릴 수밖에.

 

 


 

 

<쪼콩>

 

오늘은 남아공 이야기가 아니라 '쪼콩 칼럼' 입니다^^

 

아프리카를 판단하는 우리의 생각을 반성해보자 하는 의미에서 적어보았습니다^^

 

여기 2africa에 사회 진화론자는 없으시겠죠?^^

 

혹시 인류학자는 없으시죠?

 

너무 씹어놨더니 혹시 회원중에 계실까 겁나네ㅋㅋㅋ

 

혹시 계시다면, 님은 위 이야기에 해당 안돼요..ㅋㅋ(인기관리 하냐?--;;)

 

그럼 내일 또뵈요^^

 

아무 준비도 없이, 아무 아는 이도 없이 그저 전화번호 달랑 하나 들고 몇 년이나 머물 생각으로 외국에 나간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미친 짓이다. 그런데도 아무 준비도 없이, 아무 아는 이도 없는 외국 땅에 가고 말았다. 타고난 낙천적 성격 탓으로 돌리기에는 모자란 감이 있어, 그냥 아무 준비 없이 가도 될 것 같은 예감이 있었다면 맞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 달랑 하나 들고 온 전화번호의 주인공, 토니(Tony)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까무잡잡한 피부. 인도인이다. 한국에서 대학 다니는 동안 지도해주시던 교수님 친구, 토니는 털털하게 웃으며 자기 차에 이방인을 태워 집으로 데려갔다. 그렇잖아도 배가 주려 있던 참에 그가 직접 요리해 내준 음식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목구멍으로 넘겼다. 목구멍을 넘어 들어가는 음식은 주린 자에겐 더 없는 행복이리라. 

 

토니는 겨우 마흔 이쪽저쪽으로 보이는데 벌써 큰아들이 대학교 1학년이란다. 그리고 그 큰 아들 리납(Rinaav)은 바로 전날 축구하다가 다리가 부러져 병원에 입원해 버렸다 한다. 토니는 나 편히 쉴 방 하나 내주려고 녀석 다리가 부러졌나 보다 라며 웃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녀석은 무릎 부위를 다쳐서 그리 웃으면서 이야기할 만한 가벼운 부상이 아니었다. 것도 모르고 불쑥 찾아와 미안했다. 사정이야 어쨌든 당분간 먹고 잘 곳이 생겨 이제야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쉬라며 안내해준 큰아들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우며, 오랜만에야 제대로 된 잠자리에 눕는 느낌이었다. 버스에서 잔 하룻밤을 빼고는 전부 침대에서 누워 잤는데도 말이다. 

 

토니의 가족은 토니, 부인 라쉬르(Rashree), 대학 1학년인 큰 아들 리납(Rinaav), 고등학교 다니는 둘째 아들 리반(Rivaan), 그리고 여섯 살 난 막내딸 쉬리아(Shiria)까지 모두 다섯이다. 토니는 공장에서 빵을 가져다가 근방의 대학 기숙사와 작은 점포들에 납품하는 일을 하고, 부인은 사회 복지사 일을 하며 동시에 학교에서는 석사 과정에 있는 학생이다. 그들의 하루는 새벽부터 시작된다. 5시에 토니는 공장으로, 6시엔 라쉬르가 차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일터로 각각 나선다. 둘째 아들 리반이 조금 늦게 학교로 나간다고는 하지만, 내가 아무리 일찍 일어난다고 해도 녀석이 학교 가는 걸 본적이 없으니 적어도 7시 반 이전에는 나가나 보다. 그리고 낮 12시에서 1시 사이에 토니가 일을 마치고 돌아와 온갖 잡다한 집안일을 다 한다. 요리도 하고 아이들 데리러 학교에도 가고 한다. 토니처럼만 가사를 돕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아내에게 있어, 더 없이 좋은 남편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병원에 있는 아들에게 퇴원하기 전날까지 매일 문병도 갔다. 그리고 내가 온 이후로 새로운 일거리로, 내가 머물 집을 찾으러 돌아다니고, 가고 싶어 하던 학교에 데려가 구경도 시켜주었다. 토니는 뭐라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에게 신경을 많이 써주었다. 식사와 잠자리는 물론이고, 비자 연장 문제, 학교 입학 문제, 심지어는 기분까지도 세세하게 신경 써주어 가끔 바다도, 술집도 데려다 주고 했다. 며칠 지나자 난 거의 가족이 된 분위기였다. 덕분에 아침에 일어나 집안 청소도 도와야 했고, 설거지에다가 때로는 차 대접까지, 이 집안 식구들이 해야 할 일은 나도 다 하게 되었다. 차라리 아무것도 안하고 빈둥대며 손님 대접만 받느니, 약간의 수고로 가족 대접 받는 게 훨씬 마음도 편하고 좋았다. 그러나 어느 정도 일을 돕는다고는 해도, 공짜로 먹고 잔다는 것에 항상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오히려 토니에게 부담이 되었나 보다. 어느 날, 우연히 이 친구가 방안에서 둘째 아들에게 하는 말을 엿듣게 되었다. 

 

“집안에 Song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거든 그에게 무엇이든 부탁해라. 그래야 그 친구도 우리에게 덜 미안해하며,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을 테니까…….”

 

며칠 후, 새벽 네 시나 되었을 무렵, 토니가 흔들어 깨운다. 빵 납품할 때 옆에서 도와주던 조수가 아버지 부친상으로 며칠간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며 도와달란다. 대충 얼굴에 물만 묻히고 토니를 따라 나섰다. 공장에 도착한 것이 아침 다섯 시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빵 공장은 부산했다. 토니가 공장장이라는 귀여운 인도인 여자를 소개했다. 나이를 묻진 않았지만 어려 보였다. 길에서 만났더라면 틀림없이 겨우 고등학생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앳된 얼굴과는 다르게 공장직원들에게 뭔가 지시하는 목소리는 야무졌다. 서류를 검토하고, 빵 기계를 점검하는 모습은 당당했다. 토니에게서 토니 조수 사정을 들은 후, 그녀는 환한 미소로 내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토니는 가져가야 할 빵들을 확인하고, 내게 차에 실어달라며 부탁했다. 실어야 할 빵 상자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마에 어느 정도 땀을 맺히게 하기엔 충분했다. 송골송골 이마에 땀 맺어가며 조수는 열심히 빵을 차에 실고 있건만, 토니는 제 직장 동료들과 껄껄 웃어가며 수다 떨기에 정신이 없다. 한국인을 이렇게 조수로 부리는 사람은 남아공에 자기밖에 없을 거라며 껄껄대는데, 약간 얄밉기까지 했다. 이렇게 간사한 것이 사람 마음 이랬던가? 공짜로 얻어먹고, 얻어 자고 하는 주제에, 일 조금 안도와 준다고 벌써부터 은인을 얄미워한다. 부끄러운 마음에 얼른 오늘은 충실한 조수가 되어 운전 외에는 토니가 할 일 없도록 해주리라 마음을 고쳐먹었다. 조금 후, 토니는 파이 몇 개와 차 두 잔을 들고 왔다. 둘은 바닥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하며 아까 공장장이 이쁘네, 어쩌네 하는 농담으로 낄낄댔다. 그렇게 며칠 동안 토니의 조수로 새벽에 일어나, 어여쁜 공장장을 보고, 더반 구석구석까지 돌아다녔다.

 

이런 토니의 모습은 요새 말로 감동이다. 잘 아는 친구나 친지라도 자기 집에서 한 달 여간 공짜로 먹고 잔다면 짜증이 날 법도 한데, 짜증 한번 낸 적이 없다. 그냥 먹여 주고, 재워 주는 것이 아니라 손님을 가족으로 대한다. 부인이나 아들들에게 너무 오래 있어 미안하다 말 하니, 자주 있는 일이라 아무렇지도 않다며 신경 쓰지 말라 대답한다. 나뿐만 아니라 벌써 수십 명은 이렇게 들러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눌러 있다 돌아간 모양이다. 그런 그에게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당신은 어떻게, 생판 얼굴 한번 본적도 없는 나를 이렇게 먹여주고 재워주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내일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알 수 없다. 내일 당장 교통사고로 난 죽을 수도 있다. 그 때 넌 내 죽음을 슬퍼하며, 날 기억할 것이다. 이것이 내 재산이다. 내가 죽고 난 후에 날 기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많을수록 나는 부자이다. 너는 내 친구이고, 앞으로 나는 네가 날 깊이 생각해주고 내가 죽고 난 후 많이 슬퍼하고 날 기억해주길 바란다. 그래서 내가 너에게 이렇게 대해주는 것이다. 적어도 내일 당장 내가 죽으면 넌 내 죽음에 슬퍼할 것이지 않느냐?”  

 

요즘 책들을 보면, 재테크다 뭐다 하며 부자 되는 방법들에 대해 아주 잘 나온다. 사실 나도 돈 한 푼 없이, 없는 살림에 아들래미 꿈 이뤄주겠다며 이렇게 유학까지 보내준 부모님 돈 타 쓰면서, 부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에 감명 받아 고등학생 시절부터 골백번은 읽었는데도 이리 돈 욕심이 생기는걸 보면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토니의 말이 떠오른다. 토니에게 삶의 재산이란 자신에 대한 다른 이들의 기억이라 했다. 학교에서 아프리카를 공부하면서, 아프리카 대부분 민족들이 다산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가 더 많은 이들에게, 더 오랫동안 기억되기 위해서 그렇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인도인인 토니가 그런 민족들에게 영향을 받아 그럴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자기들끼리 똘똘 뭉쳐 타 민족들은 끼어 들어가기 힘든 인도인 사회에서 토니가 다른 아프리카 전통 민족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는 힘들다. 어쩌면 세상에는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자신에 대한 다른 이들의 기억을 재산 삼아 살아가고 있나 보다. 나 자신에게 한번 묻는다.

 

‘지금 당장 내가 죽으면 어느 누가 날 기억해줄까?’

 

얼핏 머릿속에 가족들과, 학창 시절 친했던 몇몇 친구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게 다이다. 그나마도 그들이 날 얼마나 오랫동안 기억해줄지도 잘 모르겠고, 좋은 기억으로 날 기억해줄지에 대해선 자신 없다. 동안 사고나 병으로 몇몇 젊은 친구들을 하늘로 보냈다. 꽤 친했던 녀석도 하나 병으로 세상을 떠나 보낸 적이 있다. 그 친구 이야기 좀 잠깐 하자면 참 바르고, 정도 많아 그렇게 좋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렇게 좋은 친구를 보내면서도 몇 번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내가 무뎌서 그런 것이려니 생각하며 괜히 친구에게 미안해진다. 그 친구를 생각하노라면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운 것도 것이지만, 참 마음이 따뜻해진다. 아파 지쳐 허여진 얼굴로 씩 웃으며,

 

“형 시험 공부하느라 고생이지? 나 밥 한 끼 사주면서 좀 쉬어.”

 

참 넉살 좋게 웃었다. 그리고 따뜻하게 웃었다. 

 

한번은 녀석이 내 기숙사 방에 와서는 그 좁은 침대에서 둘이 끼어 새우등으로 잠을 잔 적이 있었다. 밤새도록 콜록콜록거리며 힘들어 하는 녀석에게 미안했다. 불쑥 와서 잠 얻어 자는 주제에 자꾸 콜록거려 주인 마음을 편하게 하지 않았다. 차라리 녀석이 대 놓고 털썩 누워 나 몰라라 하고 줄창 기침 해댔다면 덜 미안했을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주인이 자기 기침에 신경이라도 쓸까봐 아주 죽을힘을 다해 참고, 참다가 기침을 터트린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다음 날 아침에 지저분한 녀석의 구두를 닦아 주었다.

 

그 친구를 기억할 때면 난 아직도 웃는다. 아직 다른 사람들 보기엔 어리디 어리고, 세상 얼마 살아 보도 못한 풋내기이지만, 그 친구와의 만남이 내 인생에 있어 참 행운이었다. 그래서 웃는 그 친구의 얼굴도 어렴풋이 기억나고, 어쩌다 할 일 없는 날, 신발을 빨 때면 녀석 구두를 닦아주던 모습을 떠올리며 피식 웃는다. 토니 말대로라면 이 친구는 적어도 재산 하나는 남겨 두었다. 아니 이 친구의 많은 재산 중에 ‘내 기억’도 같이 끼어 있다. 

 

우리는 살면서 가장 중요한 전제를 가끔 잊고 살아가지 않나 싶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죽는다는 그것이다. 물론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잊고 살아간다. 토니는 자기 죽고 나서를 위해,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재산들을 차곡차곡 쌓아나간다. 그래서 생면부지 외국인도 제 집에 한 달이고 먹여주고, 재워주며 그런 손님 대접으로도 모자라 아주 가족 대접까지 한다. 

 

토니 친구 중 제리(Jerry) 라고 하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도 토니와 비슷한 연배로 큰 아들이 대학 3학년이라 한다. 그 친구가 사업을 하다가 크게 실패하여 빚 저당으로 잡힌 집이 하루아침에 은행 손에 넘어가게 될 처지에 놓인 적이 있다 한다. 토니는 그런 제리를 위해 수천만원 돈을 은행에서 빌려, 대신 빚을 갚아 주었다 한다. 토니는 이 일을 이야기 해주면서, 기억되기 위해 그랬다 이야기했다.

 

 

 

 

 


 

 

 

 

 

 

쪼콩의 남아공 이야기 세번째 입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연재가 이십 몇일 후면 끝나겠는데요.ㅋㅋ

 

 

걍 후딱 다 해 뻐리고 놀죠 뭐^^

 

 

모기 누님 이제 좀 보기 편해졌죠?ㅋㅋ

 

 

제가 뭐 컴터 아는게 없어서...

 

 

그나마 이 정도까지 만드는데 이 것도 저것도 다 해봤습니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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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진~posted Jun 20, 2007

 

 

http://blog.naver.com/b0810rw/90011432441

 

며칠 전 Y가 꼭 가고 싶어하는 ULK라는 대학에 

여러 가지를 알아보려고 갔다가 타운의 시티마켓에 들러 

아이랑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해가 저물었다. 

 

우리는 매일 밤낮의 길이가 달라지는데 여기는 늘 같단다. 

5시 반이면 어스름해져서 6시만 되어도 캄캄하다. 

더구나 그 날 비가 많이 내려서 더 캄캄. 

타운이라고는 해도 가로등이 하나도 없는 이곳은 

동네도, 불빛도, 사람 얼굴도 총체적 캄캄^^이다. 

택시를 탈까 하다가 큰 택시(미니 버스)를 타기로 하고 

버스 정류장에를 갔는데 어찌나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갑자기 겁이 와락 났는데 같이 간 Y가 끊임없이 내 가방 단속을 한다. 

여기 도둑들이 많다고... 안 그래도 무거운 가방을 꽉 움켜쥐고 있자니 

어깨와 팔에 쥐가 나는 것 같다. 

캄캄하니 누가 달려드는지도 모르겠고...

 

거기서 한 20분을 기다리는데 

도대체가 NyeNyeri라는 차장의 외침을 들을 수가 없다. 

Y가 다른 곳으로 가서 차를 기다리자는데 이해가 되질 않아서 

비오는 캄캄한 길을 걸으며 

'왜 다른 곳으로 가야하니? 정류장 날마다 달라지니?' 

계속 질문을 쏟아대는데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질문하는 나에게 

다른 데서 타야한다 소리만 하고 계속 걷는다. 

비오는 캄캄한 길에 스쳐지나가는 행인들에게조차 

어깨를 움찔움찔하며 

10여분 걸어간 곳에도 사람들이 바글 바글, 

이번에는 몇 차례 우리 동네 버스가 지나갔는데 

너무 사람이 많아서 못 탔다. 

 

버스 정류장이 정리되기 20여 년 전 서울역이나 시경 앞에서 

앞으로 뒤로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차 기다리던 생각도 나고, 

그러다 상동교회에서 하는 여름성경학교 교사강습회 갔다가 

소매치기가 친구 가방을 이틀 연속으로 손 댄 바람에 

현장에서 잡은 소매치기 증언 받느라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이라 남대문 경찰서에서 

단체로 밤샘한 기억도 나고...

 

근 한 시간 이상 덜덜 떨며 있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택시 타자 그러는 소리를 

젊은 애들이 들었나보다. 

갑자기  Y이 웃으면서 이야기를 한다. 

쟤네들이 한 자리 당 100프랑 주면 버스 자리 잡아준다고 한단다. 

귀찮아서 택시타고 싶었지만 그래도 또 새로운 경험인지라 

사실 버스비가 100프랑인데 자리 값이 100프랑이면..따블^^이네? 

뭐, 명절 귀성 버스 암표 사는 기분으로 그러라고 하고는..

그랬더니 두 청년이 몇 번을 달려오는 차 앞을 막아서듯 달려갔지만 

내내 놓치고  몇 번의 시도 끝에 결국 제일 앞의 두 자리를 확보해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분명히 버스 정규노선이 있지만 손님이 하나도 없을 때에는 

갑자기 차장이 이용할 사람이 많은 타운 쪽이나 그런 동네를 불러 

호객하는 것을 보았다. 

이 날은 처음 보는 트래픽까지 겹쳐서 

갑자기 버스가 노선을 부티 나는 동네로 돌렸다. 

버스 기사가 뭐라 뭐라 설명하는 소리를 통역해주는데, 

버스 기사들이 정부의 정책을 저항하느라  말하자면, 데모를 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캄캄한 길에도 처음에 우리가 서 있던 자리에 

더 새카맣게 서있는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차비 200 프랑 냈더니 밤이라서 100프랑 더 내야한단다.

흐그..

부르는 게 값, 다니는 게 길.. 

내가 아무리 미니버스라고 불러도 

차비 따블^^에 

이것저것 달라지는 것 보면 

Y가 말하는 대로 택시는 택시인가 보다. 

늘 무중구를 부르며 뒤쫓아 다니던 아이들도 

다 집으로 돌아간 동네의 캄캄한 진창길을 돌아오며 

절대 밤에는 안 돌아다니리라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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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찌기posted Nov 22, 2006

 

 

 

비행기에서 내렸다. 현지 시간은 2시 30분이었다.

 

입국 수속을 하기 위해 입국장으로 이동했고 심사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내 차례가 와서 난 살짝 웃으면서 직원에게 ‘Habari’라고 인사를 했다. 직원도 나를 보고 인사를 한다.  인사까지는 좋았다. 

 

<tackle 1>

내 여권과 입국 카드를 보고 한참을 옆의 직원과 대화를 하더니 나를 옆에 있는 칸으로 불렀다. ‘뭐가 잘못됐나?’라는 생각에 겁이 났다. 비자에 문제가 생긴 건지, 여권에 문제가 생긴 건지 그 이유도 모른 채 나는 옆 칸으로 이동을 해서 다른 직원에게 심사를 받았다. 내가 답답한 마음에 ‘문제가 뭐냐?’라고 물어보니 대꾸를 안하는 거다. 오메..발음이 이상한가? 쩝.. 암튼 다시 또박 또박 물었다. ‘What's the problem?' 그제서야 'No problem'이란다. 문제가 없는데 왜 안 보내주는지.. 영문도 모른 채 한 10분을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분명 무슨 문제가 있는 거 같은데 아무도 그 이유를 얘기해 주지 않았다. 하긴 얘기해도 못 알아들었겠지만.. 

나랑 비행기를 같이 타고 온 사람들은 벌써 다 나갔나보다. 보이지 않았다. 나도 가고 싶다.드디어 문제가 해결이 되었나 보다. 오래 세워둔 거에 대한 미안함이 전혀 없어보였다. 그래서 나도 인사도 안하고 그냥 홀연히 그 자리를 벗어났다.

 

<tackle 2>

나가기 전에 검색대에 가방을 내려놓고 검사를 받는데 직원이 나를 부르더니 가방을 열어보라고 했다. 또 겁이 났다. 위험한 물건(사실 위험한 물건은 별로 없었다. 과도를 빼고는..)은 이미 수하물로 보냈기 때문에 문제가 될 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 당황했다. 지정한 가방을 열어서 보여주는데.. 오메~ 거기에는 한국에서 챙겨간 젓가락과 수저가 있었던 것이다.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었지만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다. 좀 민망했다. 위험한 거 아니라는 내 말에 의심이 가득 찬 눈으로 지긋이 바라보길래 얼른 가방에 집어넣고 ‘나가도 되냐’고 물었다. 어이가 없었는지 한번 웃더니 나를 보내주었다. 사실 내가 좀 순진한 얼굴로 쳐다보았기에 그냥 보내준 거 같다. ㅋㅋ

 

내가 다른 사람보다 한참을 늦게 나왔건만 밖으로 나가는 줄이 굉장히 길었다. 그 이유는 입국하는 사람들의 가방을 일일이 열어보는 것이었다. 오메.. 정말 탄자니아 들어가는 게 너무 어렵다. 오늘 안에 갈 수 있을런지..쩝.. 직원이 앞에 있던 몇몇의 사람들의 짐 속에 있던 물건들을 압수했다. 가져갈 수 없단다. 나도 그럴까봐 마음 잔뜩 졸이고 있는데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고 생각했는지 내 앞에서부터는 가방을 다 열어보진 않는 거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는 다행히 가방은 열지 않아도 되었다. 내가 예쁘게 생겨서 그런지 그냥 가란다..ㅋ 기쁜 마음에 나가려는데..  

 

<tackle 3>

나를 잡는 손이 있었다. 어떤 여자 분이 나를 붙잡아 세우더니 물었다. ‘이 가방 안에 무엇이 들어있냐, 음식물 같은 거 없느냐?’ 나는 당황하지 않고 당당하게 ‘전혀 그런 거 없다. 다 옷이다’라고 얘기했다. 사실 가방에는 먹을 것이 잔뜩 들어있었다. 나의 당당함에 놀랬는지 그냥 가라고 보내주었다. 역시 사람은 당황하면 안 되는 거야.

 

<tackle 4>

모든 절차를 다 마치고 드디어 다르에살람에 발을 디뎠다. 다른 사람은 쉽게 잘만 가드만..쩝.. 그래도 나를 마중 나온 사람이 있어서 매우 반가웠다. 지금 아프리카에서 열심히 공부중인 Africa를 만났다. 내가 아프리카를 간다는 얘기를 이미 이메일로 전한지라 공항에 마중 나와 주었다.  Africa는 만나자마자 인사부터 하지 않고 ‘왜 그렇게 오래 걸렸냐!'고 핀잔을 주었다. 그리고 짐을 차로 옮기면서는 '생각보다 짐이 많은 거 같지 않은데 왜 그리 무거워요?'라고 말하면서 투덜~ 투덜~ 오메~~

 

시간은 이미 4시를 향하고 있었다. 공항에서만 1시간이 넘도록 있었던 거였다. 미쵸..주차장에서 짐을 실고 빠져나가는 데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모여 있다. 순복음교회를 중심으로 공항에서 집회가 열렸던 것이다. 거리에서 행렬하고 차에서 집회하는 사람들 때문에 차가 나가는 데 한참 걸렸다. 

 

나랑 함께 여행할 팀원들은 이미 탄자니아에 9월 초부터 들어와 있었다. Africa의 전화를 빌려 팀원들에게 전화를 하고 팀원이 있는 롬보호텔이라는 곳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길에 다르에살람 대학 및 시내를 투어할 수 있었다.

 

호텔에 나를 내려주고 Africa는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약 3주정도 탄자니아를 함께 여행할 파트너와 미팅을 가졌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정리했다. 먹을 것들, 선교사님에게 드릴 것 등을 분류해서 선물은 선물대로 짐을 다시 꾸렸다. 

 

시간을 보니  6시가 넘어 있었다. 어쩐지 배가 고프더라..한국에서 싸간 햇반과 김치를 꺼내 저녁을 먹었다. 빨리 먹어야 짐이 좀 줄 것만 같았다. 

저녁을 다 먹고 7시 반쯤에 Africa가 시내에 있는 해변에 데려다 준다는 말에 맥주를 마시고자 해변으로 파트너와 이동했다. 해변은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분위기는 너무 좋았다. 외국인들도 자주 이용하는 곳이란다. 맥주와 음악을 즐기며 1시간정도 놀다가 숙소로 다시 돌아왔다.

 

파트너와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논의했다.

‘내가 가고 싶은 곳’, ‘만나고 싶은 사람들’에 대해 얘기하고 세부 일정을 하나씩 점검해 나갔다. 일정 잡고 예산 짜고 하는데만 2시간이 꼬박 걸린 거 같다.

엄청 피곤했다. 현지 시간은 밤 10시를 향하고 있었다. 한국은 새벽 4시였던 것이다. 여행으로도 지치고 힘든 몸인데다가 시차가 차이가 나니.. 왕~ 피곤하심..ㅋㅋ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샤워를 하고 잠을 청했다. 

다음날부터의 일정이 너무 기대되고 행복했기에 눈은 너무 피곤했지만 잠은 쉽게 들지 못했다.

내일은 아프리카에서의 새로운 태양을 맞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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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진~posted Jun 20, 2007

 

아프리카를 품으며 스와힐리어(kiswahili)를 배울 때 쉽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남의 말이 쉬우면 얼마나 쉽겠어?

더구나 !!! 아프리카 말인데?

그랬는데... 하~

르완다어(kinyarwanda)를 접하며 스와힐리어가 쉽다는 말이 뭔지 조금 느낀다.

 

앞으로, 뒤로 따라 붙는 녀석들이 많아서

사전도 없이 기본형을 찾자니...흐그..

 

어제 자매 하나가 기도제목을 영어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해서

'그냥 키냐르완다로 쓰렴..하나님은 너희 말 우리 말 영어 다 아시는데 뭐'..하고는...

내심^^.. 그래도 나도 알아서 돕고 싶네...하면서..

인터넷 밤새 뒤졌으나 건진 건 딸랑 3 단어...흐유...ㅋㅋ

찾았으면 움츠린 어깨 한번 펴보려고 했건만...

 

어느 나라 발음이든

연음이나 대충 휩쓸려 들어가는 발음들에

나그네는 한계를 절감하기 마련이지만...

 

특히나 키냐르완다

"w", "y"가 "b,g,m,n,r,"를 만나는 날에는 흑.. 귀가 슬프다...

그네들의 검고 두터운 입술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어도

그 뒤 어디에선가 나는 독특한 발음을 읽어낼 수가 없구나...

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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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르꽌다인지를 쓴다며...수다만.. 'rwa'는 우리처럼 '르와'로도 발음하지만 대다수의 단어에서 '륵과,르꽈'처럼 들린다. 이유는 1) 주변국가의 잦은 내전으로 서로 이주민들이 많아서 서로 다른 식의 발음을 하거나, 2) 제일의 공용어인 프랑스어와 뒤죽박죽^^된 발음 탓도 있단다.

 

멋진~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b0810rw/90010384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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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식으로 르완다라고 하면..앙골라의 수도 루안다Luanda로 알아듣는다고 한다.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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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 소녀 케이프타운을 조금 벗어나자마자 기대하던 아프리카의 모습이 펼쳐졌다. 군대 있을 때 휴전선 근방에서나 볼 수 있었던 넓은 초원과 얕으만한 언덕들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그리고 그 얕은 언덕 꼭대기엔 조그만 마을들이 듬성듬성 모여 있었다. 저 곳에는 누가 살까? 저 곳에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할까? 햇살이 따뜻하니 좋았다.

 

케이프타운에서 더반까지 버스표에는 28시간 정도 걸릴 거라 적혀 있긴 하지만 듣기로는 30시간은 족히 걸릴 거란다. 한국에서 비행기 타고 여기까지 온 시간보다도 10시간이나 길다. 이 긴 시간 동안 무얼 해야 하는지 걱정이 잠깐 들었으나, 곧 버스 승객들과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특히 내 양쪽에, 각각 배우 지망생과 레즈비언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두 남아공 친구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뭐라 뭐라 따불따불 한다. 무언가 열심히 드시는 흑인 아주머니, 저쪽 버스 뒤 칸에 앉아 누가 볼세라 몸을 홱 돌리고 아기 젖을 물리고 있는 새댁, 지루한 표정으로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아가씨. 뭐가 불만인지 울며불며 칭얼대는 대여섯 살짜리 꼬맹이들, 원래 서로 알고 지냈는지, 아니면 이 버스에서 처음 만난 이들인지는 몰라도 두 아주머니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앉아 열심히 수다 질이다. 버스 정류장에서는 TV영화 속에서나 보아왔던, 곰만큼이나 덩치 좋은 아주머니들이 제 덩치만한 짐들을 머리에 이고, 지고, 손에는 꼬맹이들 달고서 버스로 돌진하는 모습은 아마 당분간은 잊지 못할 장관이었다. 버스에서 난생 처음 하룻밤을 꼬박 보냈다. 레즈비언 친구는 중간에 내렸고 그 자리는 아침까지 비어 있었다. 오지도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해 겨우 몇 시간 눈을 붙였다. 햇살이 따가워 눈을 떠, 몇 시냐 옆에 물으니 겨우 아침 7시란다. 벌써부터 해가 참 따갑다. 대충 눈곱 떼고 자리에 앉아 있으려니 버스가 휴게소에 들어선다. 화장실도 갈 겸, 아침 먹을 거리도 좀 사러 버스에서 내렸다. 허기가 져 죽을 지경이다. 경치 좋은 곳을 찾아 자리하고 샌드위치와 콜라 한잔으로 아침을 들었다. 눈으로 멀리 초원들을 훑다가 금방 지겨워져 사람들로 눈을 돌렸다. 열심히 짐을 버스에 올려놓는 흑인 아저씨, 열심히 또 짐을 버스에서 내려놓는 흑인 아주머니, 아까 버스에서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던 새댁은 미리 준비한 도시락을 꺼내 애 한입, 자기 한입 하며 아침 식사 중이다. 그리고 새로운 승객들. 거의 모든 휴게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풍경들이었다.

 

그런데 그 중,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이가 하나 저기 있다. 소녀였다. 긴 금발 머리를 뒤로 묶어, 한 갈래 아래로 따놓은, 눈이 마치 푸른 보석 같이 반짝이는, 콧날은 또 너무 오똑해 인형의 것이라 해도 그만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소녀가, 영화에서나 보아오던 아름다운 백인 소녀가 하나 버스에 오르고 있다. 그녀는 버스에 올라 가방이 무거운지 낑낑대며 천천히 버스 앞자리에서 뒷자리로 빈자리를 찾아 걷는다. 얼른 먹던 샌드위치를 한입에 털어 넣고, 콜라를 잔뜩 들이켜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리고 재빨리 버스로 올라 그녀의 뒤에 서, 친절하게 '도와 드릴까요?' 말했다. 다행히도 그녀는 '네. 부탁 드려요.' 대답한다. 그녀의 가방을 받아 들고 내 옆자리로 안내했다. 새벽까지 레즈비언 친구가 앉아 있던 그 자리로. 자리에 앉은 그녀는 여느 승객과 달랐다. 지금 까지라면 그녀 역시 여느 승객들처럼 이 누런 피부의 황인에게 관심을 보이며 어디서 왔냐, 이름은 무엇이고 하는 등등 여러 가지 정신 없이 물어 봐야겠지만, 그녀는 그저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찬찬히 훑어본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그녀가 조금은 서운했다. 나도 그녀의 눈을 쫓아 그녀가 보는 곳을 따라 보았다. 어제 내내 그리고 밤새 보아왔던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전혀 다를 바 없이 서로 이야기 나누고, 자고, 지루해 하고 있다. 버스가 이미 출발했는데도 여전히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그저 그 사람들을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다.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 눈은 누군가를 찾는 다기 보다는 그저 그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는 듯한 눈이었다. '그녀도 나처럼 외국인일까?' 어떻게 말을 걸어 인사를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소녀가 알지 못 하게 곁눈으로 슬쩍 슬쩍 그녀를 보았다. 마치 예쁜 자기 짝꿍을 수업 중에 곁눈으로 힐끔힐끔 바라보는 초등학생처럼이나, 창 밖 한번, 소녀 한번 하면서, 설사 눈치라도 챌라 조심스럽게 소녀를 바라보았다. 하얀 원피스 치마가 땋아 내린 머리와 참 잘 어울렸다. 파란 눈과 금발은 뽀야니 깨끗한 피부와 참 잘 어울렸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문득 들었다. 다시 한 번 그녀를 머리부터 보았다. 금발, 눈, 코, 하얀 원피스, 맨발.

 

'맨발?'

 

눈이 발에 이르자 의아해졌다. 틀림없이 맨발이다. 처음 본 순간부터 그녀는 쭉 맨발이었다. 휴게소에서 맨발로 아스팔트 길을 밟아 버스로 향했고, 맨발로 버스에 올랐고, 맨발로 자리까지 갔고, 맨발로 자리에 앉아 지금도 맨발로 자리에 앉아 있다. 혹시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혹시 정신이 좀 이상한건가?' 사실 우리나라에서 맨발로 버스에 오르는 여자를 찾아보기란 하늘에 별 따기이다. 설사 그런 여자가 있다면 대번에 정신 나간 여자라는 의심을 받을 것이고 말이다. 그런데 까지 생각이 이르자 멍하니 사람들을 쳐다보는 그녀의 시선조차도 안쓰러웠다.

 

'아! 저렇게 고운 소녀가, 어린 나이에 참 안됐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나는 그녀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영화에서나 보아오던 아리따운 백인 소녀를 향한, 동경 어리던 내 시선은 이제 동정의 시선이 되어 버렸다. 머릿속에선 온통 안됐다는 생각뿐이었다. 결론이 그렇게 나자, 이젠 이런 소녀를 혼자 버스에 태우는 남아프리카 사회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부모가 누구인지, 어쩜 부모가 없을 수도, 부모가 없다면 보호자는 어쩌자고 저렇게 혼자 버스에 태워 보내자는 것인지 하며 혼자 화를 냈다. 거기다가 저 무거운 짐까지 들려서 말이다. 소녀가 더 가여워 보였다. 처음에 어떻게 말을 걸어야 할까 하던 고민은 어느 새 사라져 버리고, 앉아 혼자 씩씩거리며 머릿속으로 무섭게 화를 냈다. 옆에서 배우 지망생은 신문을 보며, 유명한 팝가수 에브릴라빈(Avril Lavigne)이 더반에서 공연을 한다고 시끄럽게 수선이다.

 

'이봐, 자네, 아무리 어리다지만 에브릴라빈 보다도 더 예쁜, 이 정신 지체 소녀가 보호자도 없이 혼자 여행한다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단 말인가? 이러다 사고라도 나면 어떡한단 말인가? 너희 남아공 사람들은 대체 이런 사람들에 대해선 전혀 신경도 안 쓴다 이건가?'

 

이젠 옆에 앉아있던 애꿎은 배우 지망생에게도 화가 났다. 뚱한 표정으로 관심 없다고 대답하고 적어도 이 불쌍한 소녀가 버스에서 내리기 까지는 내가 지켜 주겠다고 혼자 다짐한다.

 

혼자 화도 내며, 다짐도 하는 사이 버스는 십분 정도 달린 듯싶었다. 그녀가 갑자기 발아래 내려놓았던 짐을 짐 선반에 올리겠다고 낑낑댄다. 다짐대로 얼른 일어나 짐을 얹어주었다.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는 모습은 지극히 정상인이었다. 드디어 그녀가 내게 질문을 시작했다. 난 그녀가 행여 잘 못 알아듣기라도 할까봐 잘 되지 않는 영어였지만 또박또박 대답했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녀 역시 외국인인 나를 위해 참으로 또박또박, 그리고 내가 잘 못 알아들을 때마다 더 쉬운 단어를 사용해 더 또박또박 세심하게 배려하며 이야기한다. 차라리 옆에 앉아 있는 배우 지망생 보다는 몇 배나 배려해주면서 말이다.

 

"저, 실례지만 왜 신을 벗고 계세요?"

 

"이상한가요?"

 

"예, 우리나라에서는 신을 벗고 거리를 걷지 않거든요."

 

"여기서는 전혀 이상한 게 아니랍니다. 아마 여기 있는 동안 신을 벗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자주 보실 수 있을 겁니다."

 

고개를 끄덕끄덕 하며, 순간 웃음이 피식 났다. 차마 그녀에게 '난 당신이 미친 사람인줄 알았습니다.' 라고 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혼자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우습게도 미안하게도 생각 들었다.

 

어릴 때, 할머니께서 아프리카 다큐멘터리를 보며 왜 저 치들은 보기 흉측하게 머리를 빡빡 깎고 다니냐고 말씀하셨다. 그 때 난 할머니께

 

‘할머니께서 잘 모르셔서 그러는데요, 원래 저 친구들은 머리가 다 저래요.'

 

나 역시 그 잘 모르시던 할머니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주제에 말이다. 잘 몰라서 멀쩡한 사람을 정신병자로 오해해 혼자 불쌍하게 여기고, 혼자 화내고, 혼자 지켜주겠노라 다짐하고 했던 참으로 바보 주제에 뭘 안다고 할머니께 원래 저 친구들은 저렇다고 설명을 했단 말인가? 뭘 안다고 아프리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혼자 신나 따따부따하고 잘 난 척 했단 말인가? 오만 방자했던 아프리카 연구생이 고개를 숙이는 순간이었다.

 

'우리는 과연 우리 눈에 얼마나 자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과연 어느 누가 그 맨발의 소녀를 보고 제대로 정신이 있는 여자라 생각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오히려 지금까지 돌아다니는 동안 보아왔던 그 어느 누구보다도 친절했고, 아름다웠다. 그런 그녀를 대체 무엇이 나로 하여금 정신 나간 여자로 보게 했을까? 26년 여간 나를 키워낸 문화가 그랬던 것이다. ―아직 공부가 모자라 사회라고 해야 할지 문화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여기서는 문화라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여기서 문화라는 것을 왈가왈부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무안하고 부끄러울 뿐이다― 내 머리는 자라는 동안 보고 듣고 배운 것들을 통해, 상식이라는 이름의 고정 관념으로 온통 채워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흔히 말하는 문화 충격이란 다른 문화 사람들의 사는 모습에 받는 충격이 아니라, 다른 상식을 보며 자신의 상식이, 고정 관념이 깨질 때 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차창 밖에 펼쳐진 넓은 대지를 보며 '과연 아프리카답다!' 라고 감탄 하던 모습조차도 부끄러워진다. 대체 아프리카다운 풍경이란 무엇인가? 동물의 세계에서 본 바로는, 넓고 넓은 사바나 그리고 듬성듬성 서 있는 못 생긴 나무들, 사자가 누우 떼를 덮치고, 치타가 영양을 쫓아 시속 100 Km로 달리고, 코끼리 떼가 지겨운 발걸음을 느릿느릿 옮기는, 그런 풍경이 아프리카다운 풍경이었다. 대학 시절, 언젠가 '아프리카 사회와 문화' 라는 수업의 첫 시간에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작은 쪽지를 나눠주고 아프리카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을 하나씩만 적으라 했다. 기억으로는 그 때 태반 이상의 학생이 '야생 동물' 이라고 답했다. 이 정도로 아프리카는 야생 동물의 왕국이고 어딜 가도 사자, 치타, 영양 등의 동물들을 쉽게 볼 수 있는 땅으로 고정되어 버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잘난 척 좀 한다고 그 쪽지에 근사하게 '성인식' 이라고 적었다. 이런 내 기대를 만족시켜주기 위해서는 각 아프리카 부족은 - 비록 지금 나는 '아프리카 민족' 이라고 표현하지만 그 때 내겐 '아프리카 부족'이었다 - 나름의 성인 의례를 위해, 돌로 만든 칼로 할례를 하고, 몸에 상처를 내며, 염소를 잡아 염소 피를 마시고 그 피를 몸에 바르고 사자를 사냥하러 가야만 했다. 버스 창, 바깥 풍경에는 사자도, 치타도, 코끼리도 없었다. 보이는 동물이라고는 가끔 농장에서 키우는 양, 소, 말, 타조가 다였다. 어디에도 몸에 화려한 무늬를 집어넣고, 귀나 입술에 주먹이 들어갈 만한 구멍을 뚫은 사람을 볼 수 없었다. 할머니가 보기 싫어하던 짧고 꼬불꼬불 엉킨 머리가 많긴 했지만, 길게 기른 친구들도 꽤 많이 보였다. 물론 우리가 다큐멘터리를 통해 보고 그래서 어릴 때부터 상상해 오던 그런 아프리카의 모습들은 틀림없이 여기 어딘가 땅에 존재할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다큐멘터리 만드는 사람들이 없는 걸 거짓으로 만들었을 리는 없지 않은가? 문제는 그 것이 아프리카의 모든 것이라는 착각이다. 그 착각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아프리카는 동물과 원시 부족들과 식인종들이 우글대는 땅으로 아직까지 우리에게 남아있다. 1주일 정도 밖에 머물지 않았지만 적어도 내 지나온 곳에서는 단 한 번도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잠깐 잠이 들었다. 햇살은 따스하다 못해 따가울 지경이다. 그나마 버스 에어컨 바람이 있어 살만하다. 버스 안의 풍경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맨발 소녀가 없어진 것만 빼고는 말이다.

 

그 곳에 있는 동안 내내, 나는 어디 나갈 때 마다 신발에 양말까지 다 신는다고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아왔다.

 

 


 

<쪼콩>

두번째 이야기 '맨발소녀' 입니다^^

정말 이쁜 소녀였어요.

아직도 얼굴이 생각날 정도네요ㅋ(이글 우리 아내님이 보시면 난 죽었다. ㅋ)

내일 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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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깜찌기posted Oct 31, 2006

 
 

한참을 잘 자고 있는 데 코 끝으로 음식냄새가 전해져 왔다.

벌써 기내식을 먹을 때인가 하고 시간을 봤더니 출발한 지 3시간 정도 흘러있었다. 정말 잘 잔거 같다.  다행히 침은 안 흘렸다.

 

첫 번째 기내식은 가볍게 하는 식사로 오므라이스랑 한국식 ‘죽’이 나왔다. 난 죽을 워낙 좋아하는 지라 죽을 선택했는데 맛이 좋았다. 

음식을 먹기 전에는 배가 고프지 않았었다. 근데 먹고 보니 굉장히 배가 고팠나보다. 정말 열심히 먹었다. 오메~ 뱃속에 거지가 들었나~

옆 사람과 한마디 말도 없이 열심히 먹기만 했다. 옆에 사람이 외국인이냐? 그렇지 않다. 한국 여자분 이었다. 외국 사람이었으면 대화를 시도했을 것이다. 아마도..ㅋ

기내식을 다 먹고 이 닦고 또 잤다. 자도 자도 잠이 온다. 이러다 잠순이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ㅎㅎ

 

두 번째 기내식은 자주 등장하는 치킨과 생선이었다. 치킨을 좋아하는 나는 당연 ‘치킨, please'라고 말했다. 옆에 여자분은 생선을 달라고 했는데 내 거보다 더 맛나게 보였다. 생각보다 치킨이 맛이 없었다. 생선을 먹어볼 걸 그랬나보다. 하긴 워낙 새로운 음식에 시도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지라 ...아프리카 음식이 안 맞을까봐 그것이 제일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 참에 살을 왕창 빼오는 것도 좋을 듯..ㅋ

 

시간을 보니 아침 8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얼핏 보니 창 밖은 깜깜했다. 

아마 한국보다 몇 시간이 느린가보다. 

두바이에 도착하려면 2시간 정도가 남았다.

 

잠도 실컷 잤겠다 일기를 쓰기로 했다. 

여행하면서 일기를 꼭 쓰라는 주변사람들의 말이 생각났다.

하긴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이 아무리 좋은 곳을 다녀와도 오래가지 않음을 잘 알고있기에 나도 이번 여행을 통해 열심히 일기를 쓰기로 했다.

오랜만에 일기를 쓰는 것 같다. 어렸을 때는 숙제를 핑계로 열심히 일기를 썼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래도 일기 쓰는 거 좋아했었다. 편지 쓰는 것도..

요새는 일기를 쓰거나 편지를 쓰는 게 익숙치가 않다. 그만큼 내 마음이 건조해 졌다고나 할까? 이번 여행을 통해 건조했던 마음을 좀 녹여 볼란다.

 

혼자 여행하는 것은 나름 재미있다. 

혼자 놀아야 하고, 혼자 밥 먹어야 하고, 혼자 사진 찍어야 하지만 나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생각하는 시간으로 혼자 여행을 해 보기를 권한다. 

가끔은 잠만 잘때도 있고, 많이 심심하지만 이번 여행이 나를 재 발견하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임을 안다.

 

<5:5:5의 미학>

드디어 두바이 공항에 도착했다.

한국 시간을 봤더니 오전 10시였다. 

두바이는 새벽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한국보다 5시간이 느렸다. 

재미있는 건 두바이에 도착한 시간이 새벽 5시, 다음 비행기를 타기 위해 대기해야 하는 시간이 5시간, 두바이에서 다르에살람까지 가는 데 5시간이 소요된다.

똑같은 5지만 장소와 시간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짐을 새삼 느낄 수 가 있었다.

 

 

두바이 공항은 무지 화려하고 멋있었다. 

사람들이 두바이 공항에 볼 것도 많고 화려하다는 얘기를 했는데, 좋았다. 인천 공항보다는 규모는 훨씬 작지만 그 화려함은 놀라웠다.

면세점에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다. 난 그다지 살것이 없기에 그냥 돌아다녔다(사실 돈이 없었음..ㅋㅋ).

두바이에서 가장 비싼 자동차도 구경하고 ‘금’ 도 구경했다. 생각보다 저렴하다. 만약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돈이 좀 남는다면 팬턴트를 하나 장만해야겠다.ㅋ

돌아다니는 것도 힘들었다. 항공권에 게이트 번호가 안 적혀 있어서 관계자한테 물어본 뒤(영어로 물어 봄) 갈아타야 할 비행기 게이트에 도착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다보니 잠이 왔다. 기내에서 그렇게 잤건만 잠은 또 왔다. 

오메~무거운 배낭을 다리 사이에 끼고 보조가방과 장바구니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 잤다. 시끄럽고 복잡한데도 잠은 잘 오더라. 미쵸~

 

비행기를 타야할 시간이 다 되었나 보다. 옆에 있던 사람이 나를 깨웠다(왕~ 민망하심ㅠ) 이번 좌석은 창가쪽이어서 열심히 밖의 풍경을 찍었다. 사실 어두워서 하나도 안 나왔지만..쩝..

 

해가 떴나보다. 밖에서 비추는 햇살이 따사로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다르에 살람에 도착한다.

처음 출발 할 때는 별로 못 느꼈는데 막상 5시간 후면 도착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설레였다. 빨리 도착하면 좋겠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하늘이 어찌나 이쁘던지..

그 하늘을 마음에 가득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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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비언과 배우 지망생 그리고 덜 떨어진 황인

 

 

 

이제 목표했던 더반(Durban)으로 향한다. 케이프타운(Cape Town). 겨우 나흘 머물렀지만 고마우신 목사님의 도움으로 아주 편하게 머물다, 그리고 케이프타운에 좋은 인상만 가지고 간다.

 

버스 정류장에서 배웅 나온 친구들과 목사님께 포옹으로 인사를 한다. '포옹' 긴 말 필요 없는 그리고 진정 정 깊은 인사가 아닌가? 차창 밖에 버스가 출발해 안보일 때까지 그들이 손 흔들고 있다. 누군가를 보내는 사람은 한 사람을 보내지만, 떠나는 사람은 모두를 보낸다는 어느 누군가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언어에 대한 압박과 새로운, 전혀 알지 못 하는 또 다른 어느 곳으로 향한다는 두려움. 이제 약 30시간가량 버스에만 있어야 할 것이다.

 

옆자리에 이제 고등학교 1, 2학년쯤으로 보이는 흑인 친구가 하나 앉아 있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누런 피부의 황인 하나가 제 옆자리에 앉는다는 걸 신기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듯싶었다. 당장이라도 말을 건네고 싶었으련만, 그는 참을성 있게 아쉬운 작별의 순간을 끝까지 기다려 주었다.

 

"하이(Hi)"

 

드디어 입이 떨어졌다. 환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앞으로 수백 번을 더 들을, 뻔한 질문들을 인사치레로 한다.

 

"어디서 왔어?"

 

한국.

 

"난 아무개야. 네 이름은?"

 

순간 당황하는 황인이었다. 영어 이름을 안 만들었던 것이었다. 송(Song)이라고 대답한다. 성(姓)이다. 그리고 더듬더듬 더반에 있는 대학교에 유학 왔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이 덜 떨어진 황인은 지금 제가 자기를 어떻게 소개했는지도 전혀 기억을 못 하고 있다.

 

"난 배우가 되려 해. 그래서 텔레비전에도 나오고 돈도 많이 벌고 싶어. 그래서 나 더반에 가는 거야."

 

배우 지망생이라. 그러고 보니 이 친구 제법 잘 생겼다.

 

"비록 더반에는 아는 사람도, 잘 곳도, 그리고 돈도 없지만 난 꼭 성공할거야."

 

뭐? 그럼 가족들은?

 

"모두 케이프타운에 있어."

 

이런 황당한 친구가 다 있나. 이제 고등학교 2학년짜리가 배우가 되려고 집을 나와 잘 곳도, 아는 이도 없는 땅으로 돈도 없이 간단 말이야? 종종 아는 친구들 중에 배우를 또는 가수를 꿈꾸는 친구들은 있었어도 이 친구처럼 무턱대고 상경하는 친구는 본적이 없다.

 

한 시간이나 달렸을까? 버스가 선다. 간이 버스 정류소이다. 반도 안 차있던 버스가 그나마 반은 조금 넘게 찼다. 30대 중반쯤이나 되어 보이는 한 백인 여자가 웃으며 인사하고 옆자리에 앉는다. 세 명이 앉을 수 있는 자리에 창 쪽에서부터 흑인, 황인, 백인이 쪼로로 앉아 있다. 역시 그 여자에게도 이 황인은 관심 대상이었다. 한 시간 남짓 동안 벌써 열 번은 더 들었을 자기소개를 또 한다.

 

"난 지금 포트엘리자베스(Port Elzabeth)에 여자 친구(girl friend) 만나러 가는 길이야."

 

"여자 친구?"

 

여자가 말하자 옆에 앉아 있던 어린 배우 지망생이 놀라 묻는다. 뭐 놀랄 일이라고, 여자가 여자 친구 만나러 간다는 게. 이 무지한 황인은 남자 친구(boy friend)와 여자 친구(girl friend)는 '애인'을 뜻한다는 걸 배운다.

 

"난 5년 전쯤에 남편과 이혼하고 지금은 여자 친구 만나고 있어. 난 레즈비언(lesbian)이야."

 

뭐 이런 친구들이 다 있는지. 자기가 레즈비언라고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이런 황당함이란. 옆에 있던 배우 지망생은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 한다.

 

이상한 이 셋은 몇 시간 동안 함께 했다. 버스가 중간 중간 휴게소에 설 때 마다 같이 내리고, 같이 먹거리를 사고, 같이 먹다가 같이 버스에 올랐다. 두 남아공인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이것저것 영어 단어를 가르쳐 주고, 한국에 대해 묻고, 또 남아공에 대해 설명해 줬다. 특히 레즈비언 친구는 밤잠도 제쳐두었다. 중간 중간 버스가 설 때마다 누군가가 내리고, 새로운 사람들이 타고 했다. 새벽 1시나 되었을 쯤, 레즈비언이 짐을 챙기기 시작한다. 이제 곧 내릴 거라고. 몇 시간이었지만 정 들어, 아쉽기만 했다. 악수와 포옹을 인사로 레즈비언 친구가 버스에서 내린다. 창 밖에 그녀의 여자 친구가 그녀를 껴안고 인사하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데……. 동성연애에 두 발 벗고 반대하던 이 황인은 그들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한다.

 

얼마나 잤을까? 햇살에 눈을 떴다. 시계도 가방 깊숙이 박아 넣어 둔지라 몇 시인지 알 길이 없었다. 옆에 배우 지망생은 여전히 자느라 정신이 없다. 주위를 대충 둘러보니 사람들이 제법 많이 바뀌었다. 아무래도 케이프타운에서 더반까지 버스로 가는 이들은 황인과 배우 지망생 둘 뿐인 듯싶었다. 하긴 대부분은 비행기로 가겠지. 이스트 런던(East London)이라는 곳에 도착하자 험악해 보이는 두 사람이 버스에 올랐다. 그리고 앞자리부터 차근차근 표 검사를 한다. 검표관이었다. 표를 꺼내 들고 그 두 사람을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배우 지망생이 표를 좀 보여 달란다. 그에게 건네자마자 그는 세 장으로 되어 있던 표 중에 한 장을 찢어 제 호주머니에 넣고 나머지 두 장을 돌려주었다.

 

‘표를 잃어버렸나 보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지만 표를 다시 내놓으라고 야박하게 굴 수는 없다. 어차피 나머지 두 장이 있으니 별 문제야 없겠지. 마침내 검표관들이 왔다. 표를 받아 든 그들은 제들끼리 알 수 없는 말로 몇 마디 주고받더니 버스 앞쪽으로 좀 와달란다. 그 한 장이 그렇게 중요한 거였나? 나머지 한 장 어디 있냐 묻기에 잃어버렸다고 대답했다. 승객 명단을 펴더니 여권을 보여 달란다. 여권을 가져다 주자 이름을 승객 명단에서 확인하고 새로운 표 한 장을 즉석에서 끊어준다. 그리고 웃으며 이제 잃어버리지 말라고 충고한다. 걱정스런 눈빛으로 앞 쪽을 쳐다보던 배우 지망생은 일이 무사히 잘 진행되자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 배우 지망생 차례이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얻은 표를 꺼내 검표관들에게 건넸다. 그런데 표를 보자마자 검표관들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어진다. 그들은 받아 든 표를 황인에게 보이며,

 

"네 표 여기 있다."

 

아차! 그 표에는 승객 이름이 떡 하니 써 있었던 것이었다. 검표관 중 하나가 배우 지망생에게 알 수 없는 남아프리카 말로 윽박지르자, 배우 지망생은 당황한 표정으로 열심히 변명을 하는 듯싶었다. 결국 그 역시 승객 명단 앞으로 끌려 나갔고, 잠시 후 그는 주섬주섬 짐을 챙겨 버스에서 쫓겨났다. 그는 더반행이 아닌 중간쯤 되는 곳까지 버스표를 끊었고, 그래서 중간에 더반으로 가기 위해 표를 훔친 것으로 판명이 났던 것이었다.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안녕이었다.

 

황인은 그렇게 처음으로 사귀었던 두 남아공 친구들을 보내었다.

 

 

 

 




 

<쪼콩>

 

오늘 이야기 재미있으셨나요?^^

 

처음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도착하여 케이프타운에서 더반까지 버스로 향하는 길에 만난 친구들에 대해 적었습니다.

 

지도를 보시면요 케이프타운은 남아공 남서쪽 끝자락에 있구요, 더반은 동쪽에 있어요.

 

확인해 보셨나요? 히히 거리가 상당하죠?!^^ 버스로 30시간 조금 못되게 걸리더라구요.

 

더반은 KwaZulu Natal 지역에 있는 가장 크고 가장 상업화된 무역항구도시랍니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큰 수출입 항구라죠?!

 

제가 다니던 학교에서 그 항구가 보였는데 뭐 제가 무역에 대해 하는게 영 없어서인지 작아보이더라구요^^ 하지만 학교에서 내려다본 항구 경치는 아주 그냥 죽여줘요.ㅋ 맨날 점심밥 사들고 항구가 잘 보이는 잔디밭에 앉아 밥 먹었던 생각이 나네요^^

 

한국에 있어서 더반 하면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로 유명한 권투선수 홍수환씨의 바로 그 경기가 있었던 장소로 많이 알려져 있죠. 아직도 어떤 분들에게 "더반에서 공부했습니다" 그러면 "어! 홍수환이 경기했던 곳 아냐?" 하더라구요.

 

 

 

이 이야기를 보시고 서로 많이 나누었으면 합니다^^ 보시고 어떠셨는지 댓글도 많이많이 달아주시공~ 댓글들 보면서 저는 수정, 정정, 고치기, 땜빵, 삭제, 훔쳐오기 등에 적극 참조하여 더 재미난 글들 쓰도록 할께요~

 

 

 

첫 이야기 이렇게 열었네요. 시작이 반이라죠?^^

 

그럼 내일 또 재미있는 이야기 올릴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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